3월, 경기를 앞두고 말 ‘파워시티’를 마방(馬房)에서 데리고 나올 때였다. 이금주 기수(38)는 말의 상태가 심상치 않다는 걸 직감했다. 경기에 못 나갈 정도는 아니지만 컨디션이 좋지 않은 징조가 느껴졌다. 이 기수가 ‘파워시티’에게 말을 걸었다.
“많이 아프면, 나가지 말자. 하지만 뛸 수 있으면 1등을 해줬으면 좋겠어.”
말이 대답을 할 리는 없었다. 그러나 마음에서 마음으로 뭔가 ‘찌릿’한 느낌이 전달돼 왔다.
12마리의 말이 렛츠런파크 서울경기장 출발선에 섰다. 말들이 놀랄까 봐 출발 시 총을 쏘지는 않는다. 게이트(문)가 열리면 그게 출발 신호다. 터질 듯한 긴장감으로 장내가 조용해졌다.
드디어 게이트가 열렸다. 출발 100m까지는 채찍을 사용할 수 없기 때문에 기수는 ‘끌끌끌’ 하며 소리 신호를 주거나 체중을 말 앞쪽으로 이동하는 식으로 말을 출발시킨다. 100m를 넘기자 기수들이 말을 재촉했다. 쇼트트랙과 흡사한 풍경. 기수들이 코너 안쪽으로 유리한 위치를 파고들기 시작했다.
다리 부상에도 나를 위해 달려
4코너를 돌아 400m를 지났을 때였다. ‘파워시티’가 오른쪽 앞다리를 제대로 쓰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이 왔다. 아니나 다를까, 자세히 보니 계속 왼쪽 다리로만 뛰고 있었다. 원래 경주마들은 한쪽 다리에 힘을 실어 몇 번 질주하다 반대쪽 다리로 체중을 옮겨 달린다. 이 기수는 채찍을 들어올렸다가 다시 손을 내렸다. 한쪽 다리로 불편하게 달리는 말에게 채찍을 내려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승자는 파워시티였다. 결승선을 1등으로 통과한 것이다. 이 기수는 승리의 기쁨보다 사력을 다해 달린 말 생각에 그저 울기만 했다. 경기가 끝나고 보니 오른쪽 앞다리를 제대로 디디지 못할 정도로 부상 정도가 심했다. ‘경기 전에 내가 아프더라도 달려서 1등 하자고 해서 무작정 달린 건가. 괜히 내가 욕심을 부려서….’ 다리가 부러지기라도 하면 경주마로서는 쓸모가 없어진다. 그런 생각을 하니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이 기수가 파워시티를 만난 건 지난해 12월, 파워시티는 거칠고 사람 말을 잘 안 듣는 ‘문제마’였다. 굴레를 씌우려면 도망을 다니고, 실력도 신통치 않아 보인다고 사람들이 수군거렸다. 우승은커녕 경기에 제대로 나갈지조차 의문시됐다.
하지만 이 기수는 엄마의 마음으로 파워시티를 돌봤다. 매일 쓰다듬고 직접 목욕시켜 주면서 사랑하는 마음을 전했다. 그러자 차츰 말의 성품도 변해갔다. 마침내 1월 데뷔전에서 첫 승을 거둔 후 3월 2승을 거머쥔 것이다.
평소 ‘동물과의 교감’에 대해 시큰둥했던 기자였지만 파워시티와 이 기수가 마음을 나눈 이야기는 감동적이었다. 자식 자랑이라도 하듯 이 기수는 휴대전화에 저장된 말의 여러 모습을 보여주며 환하게 웃었다. 다행히 3월 경기에서 입은 부상은 크지 않았다. 치료를 받으며 틈틈이 이달 말 열리는 경기에 대비하고 있다.
馬房에 여자왔다고 소금 뿌리던 시절
이 기수가 말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은 관동대 사회체육학과 2학년 시절, 승마 수업을 처음 받을 때였다. 코치가 “처음 타는 사람치고 너무 잘 탄다. 기수가 될 잠재력이 엿보이지만 아직까지 여자 기수는 안 뽑는다”고 말했다. 그도 처음부터 기수가 될 생각은 아니었다.
그런데 졸업할 때인 1997년 말, 외환위기가 불어닥쳤다. 다른 전공자들과 마찬가지로 체육 전공자들도 취업이 안 됐다. 그때 한국마사회에서 처음으로 여자 기수를 뽑는다는 공고가 떴다. 그는 1999년 시험을 통과해 후보생으로 입소했다. 여자 5명, 남자 20명이 군대 같은 기숙사 생활을 시작했다.
오전 5시에 일어나 점호를 하고, 구보를 마치면 마방에서 말똥을 치우고 하루 종일 말을 탔다. 말의 생태를 배우고, 승마와 관련된 각종 법규와 지식도 익혔다. 외박은 1주일에 한 번 가능했다. 훈련이 너무 고되다 보니 도중에 그만두는 사람도 많았다. 2년간의 후보생 연수 후 남은 여자 기수는 이금주, 이신영, 이애리 씨 등 3명. 이 중 이금주, 이신영 기수가 2001년 7월 데뷔를 함께 했고 이애리 기수는 이듬해 데뷔했다. 이신영 기수는 현역 은퇴 후 2011년부터 조교사로 활동하고 있어 현재 현역으로 뛰는 최고령 여성은 이금주 기수다.
여자 기수를 뽑기는 했지만 여자를 기피하는 문화는 여전했다. 말들이 기거하는 마방에 여자가 들어오는 것 자체를 마필관리사, 조교사가 싫어했다. 부정 탄다는 이유에서다. 이 기수가 지나갈 때 ‘야 얼른 소금 뿌려라’라는 말이 뒤에서 들리기도 했다. 경기가 끝나면 말을 목욕시키면서 남자들도 옷을 몽땅 벗고 같이 씻는 문화가 있었는데 ‘여자들이 있으니까 불편하다’며 투덜거리는 사람도 있었다.
말 주인들도 여자 기수를 꺼렸다. 토요일은 10회, 일요일은 11회 경주가 열리는데, 말은 한 달에 보통 한 경주만 뛸 수 있기 때문에 기수는 매번 다른 말을 타야 한다. 한 경주 2분만 달려도 450kg짜리 말의 체중이 10kg 이상 빠질 정도로 숨을 헐떡인다. 마주(馬主)들은 쉽게 말을 내어주지 않았다. 이 기수는 “‘난 여자 기수 안 쓴다, 말 못 준다’는 마주를 설득하는 게 제일 큰 어려움이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굳이 기수가 하지 않아도 되는 말 목욕이라든지 말똥 치우기 같은 허드렛일을 마다하지 않는 이 기수의 모습을 본 마필관리사와 마주들의 마음이 바뀌기 시작했다. 심지어 나중에는 “여자 기수가 있는 마방이 분위기도 좋고 팀워크도 좋다”는 칭찬까지 나왔다. 현재 현역 기수 63명 중에서 여성 기수는 7명이나 된다.
공감 능력이 제일 큰 능력
경마에는 보통 10∼14마리의 말이 출전한다. 우선은 말의 능력이 중요하지만 그 다음으로는 기수의 능력이 중요한다. 관람객들은 어떤 기수가 타는지도 확인해 베팅을 한다.
경마는 성(性) 구분이 없는 국내 유일한 프로 스포츠라고 할 수 있다. 남자 기수와 여자 기수가 함께 경기하기 때문이다.
이 기수가 데뷔한 지 3개월 후, 단거리 1000m(트랙 반 바퀴) 경주에 나갔을 때 그에게 베팅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하긴 우승후보도 아닌 말을 이끄는, 경력도 얼마 안 된 여자 기수에게 누가 기대를 하겠는가. 그런데 처음에는 뒤처졌던 이 기수가 다른 말들을 하나둘씩 제치더니 결국 1등으로 결승선에 들어섰다.
“경마에서 기수의 힘이 중요한 건 사실이지만 힘만 갖고 하는 건 아니에요. 여자 기수의 장점은 섬세하고, 말과 소통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남자 기수들보다 유연성이 좋은 만큼 게이트가 열렸을 때 스타트가 빠른 편이죠.”
그 역시 일을 그만두고 싶을 때가 있었다. 2004년 훈련 중 말이 머리를 갑자기 뒤로 확 젖히는 바람에 왼쪽 눈두덩이 함몰될 정도로 심하게 부상을 당한 것. 3시간 넘게 수술을 받는 큰 부상이었다. 그때 여파로 시력이 약간 떨어졌다.
“어두운 병실에서 ‘무섭다, 두렵다’는 생각이 들었다. 낙마로 세상을 떠난 선배들 얼굴도 떠올랐다. 퇴원하면 그만둬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2개월 뒤 퇴원을 했는데, 갑자기 말 얼굴이 너무 보고 싶어 마방에 들어섰다.”
그는 “사람들이 ‘내게 말 귀신이 씌었다’고 농담처럼 말하는데 살아있는 동물과 교감해본 경험이 있는 사람은 내 심정을 알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는 올해 4월 모로코에서 열린 아랍에미리트(UAE) 주최 국제여성기수 초청경주에서 다른 12개국 기수들을 제치고 우승을 차지했다. 한국 경마 최초로 여성 기수가 국제경마대회에서 우승한 것이다. 이 기수는 “7세 아들이 모로코에서 우승한 것을 보고 ‘우리 엄마, 정말 멋있고 자랑스럽다’고 말해줘서 기뻤다”고 말했다.
그는 결혼과 임신으로 2007∼2009년 공백 기간을 가진 것 외에 10년 넘게 꾸준히 현역생활을 이어왔다. 처음에는 시댁 어른들의 걱정도 많았다. 경마는 한번에 큰돈을 따보려는 중년 남자들이 주말에 경마장에 모여 벌이는 사행성 산업이 아니냐는 편견도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주말 경기 때 시어머니와 남편이 경기장에서 응원해주는 든든한 지원군이 됐다.
여성 기수들이 점점 많아지면서 경마 문화에도 변화가 감지된다. 가족 단위로, 커플 데이트로 부담 없이 찾는 사람들이 는 것. 한국마사회가 2004∼2013년 마권 구매자의 성향을 분석해 봤더니 최고 베팅 금액인 10만 원권이 2004년 6.6%에서 2013년 3.1%로 크게 줄어든 대신 1만 원권 이하 구매 건수는 62.2%에서 71.2%로 늘어났다. 그만큼 건전하게 즐기는 사람들이 많아졌다는 뜻이다.
체육학 석·박사 학위까지 딴 그는 현재 대학 5군데에서 사회체육학과 강사로 학생들에게 승마를 가르치고 있다. 이 기수는 “여자 기수들을 더 많이 배출시키는 것이 꿈이다. 승마의 즐거움을 사람들에게 알려주고 싶다”고 말했다.
새벽훈련을 마치고 다시 훈련을 위해 마방으로 가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휴게실에 앉아있던 여자 후배 이아나 기수(25)가 말했다.
“체중 관리를 위해 점심도 안 먹어요. 그냥 여자 선배인 줄 알았는데 자기 관리 철저하게 하고, 항상 열심히 하는 모습 보면 ‘우아’라는 탄성밖에 안 나와요. 우리 후배 여자 기수들에겐 든든한 롤 모델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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