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앤젤리나 졸리,윌리엄 헤이그]‘비열한 전쟁범죄’ 성폭력 근절 위해 인류가 나서야 할 때

앤젤리나 졸리 미국 영화배우

만약 가족이 무장 괴한에게 납치돼 강간당하거나 성노예로 팔려 간다면? 성인 남녀는 물론이고 어린이들까지 이런 충격적인 환경에 노출돼 있다면? 그런데 성범죄자는 아무렇지도 않게 남은 생을 자유롭게 살아간다면? 이런 일이 상상이 되는가. 그런데 현실이다.

전 세계 분쟁지역에서 성폭력을 당한 피해자가 수백만 명에 이른다. 이런 현실이 우리가 ‘분쟁지역 성폭력 종식을 위한 캠페인’을 벌이는 이유이다. 전시(戰時) 성폭행의 피해자는 여자만이 아니다. 당장 유럽만 봐도 대륙 한복판의 보스니아에서 1992∼1995년 4년간의 내전 중 여성 5만 명과 수많은 남성들이 성폭행을 당했다. 20여 년이 흘러 보스니아는 안정을 찾았지만 수많은 피해자들은 정의가 상실된 시간을 보냈다. 성폭행은 모든 대륙에서 분쟁 때마다 전쟁 무기로 동원되는데, 이는 단순히 성(性) 문제가 아니라, 권력욕과 정복욕의 소산이다.

윌리엄 헤이그 영국 외교장관

성범죄의 본질은 피해자들을 일생 동안 고립시키면서 두려움에 떨게 한다는 데 있다. 일부 국가에서는 성폭력 피해자를 매춘부로 보거나 결혼 부적격자로 여긴다. 많은 피해자들이 사회적으로 낙인찍힌 채 정신적으로 고통받고 물리적인 공격을 받기도 한다. 법적인 보호 장치가 없는 탓에 피해자들은 회복을 위한 재정적, 의료 지원도 받지 못한다.

피해자들이 어릴 경우엔 신체와 정신뿐 아니라 그들의 미래까지도 돌이킬 수 없이 훼손될 수 있다. 그리고 피해자라는 낙인은 성폭력으로 태어난 아이에게까지 대물림되기도 한다. 그런데도 전시 성폭력은 그 범죄 규모와 폭력성이 널리 알려지지 않고 있다. 실상을 안다면 누구든지 그 부당함에 치를 떨 것이다.

전쟁에서 싸우다 죽은 전사자들을 위해서는 추모비를 세워 희생을 기린다. 전시에 성폭력을 당한 피해자의 고통도 기록한다면 얼마나 거대한 추모비가 필요할지 상상해 보라. 그런 추모비가 있다면 아마 매일 새로운 이름을 새겨야 할 것이다. 분쟁지역에서의 성폭력 범죄는 당신이 이 글을 읽는 이 순간에도 일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몇 가지 흔들리지 않는 신념을 공유하기 위해 힘을 모으게 됐다.

우선, 우리는 전시 성폭력이 불가피한 것이 아니며 저지할 수 있고 예방할 수 있으며 처벌할 수 있는 고의적인 전쟁 범죄라고 확신한다. 둘째, 문제의 본질은 정의에 있다고 믿는다. 이런 범죄에 세계가 아무 행동도 취하지 않을 때마다 성폭력이 처벌받지 않는다는 전례를 남기게 된다. 셋째, 도덕적인 책임의 문제이다. 전시 성폭력에 눈감는 나라가 인권을 존중한다고 말할 수 없다. 그뿐만 아니라 국가 간 갈등을 야기하는 중요한 외교 문제이기도 하다. 전시 성폭력을 근절하는 것은 국가안보에 필수적이다.

넷째, 전시 성폭력은 여성들의 권리를 저해하기도 하다. 우리는 남편의 폭력이나 가혹한 사법제도로 고통받는 여성의 이야기를 접한다. 전시 성폭력을 처벌해야 다른 여성 문제도 개선될 것이다. 다섯째, 전시 성폭력이 너무 거대하고 복잡한 문제라는 인식을 거부한다. 노예무역이나 불법 무기무역을 금지하는 것과 비슷하게 취급되지만 여론이 조성되고 각국 정부가 나설 때 신속한 변화를 이룰 수 있다.

변화는 이미 일어나고 있다. 지난해부터 진행한 ‘전시 성폭력 근절을 위한 선언’에 세계 4분의 3 국가가 지지했다. 그리고 이번 주 런던에서 100여 개국 정부 관계자, 유엔 기구 대표, 전문가 1000여 명이 모여 국제회의를 열었다.

이번 회의는 분쟁 중 성폭력을 기록하고 조사하는 방안을 논의하는 첫 국제회의이다. 우리는 조사관들이 성폭력 범죄가 일어난 뒤의 여파에 대한 정보와 증거를 보존해 가해자를 기소하고 피해자를 정신적 외상으로부터 보호할 수 있도록 도울 것이다. 또한 각국에 강간이나 성폭력에 대한 법규를 국제 수준에 맞추도록 요구할 것이다. 아울러 모든 군인과 평화유지군에게 분쟁 중 성폭력 예방 교육을 시키도록 요청할 것이다. 성범죄자들을 사면해서는 절대 안 된다는 점을 각국에 촉구할 것이다. 그리고 피해 생존자들과 그들을 돕는 소리 없는 영웅들을 지원하도록 요청할 것이다.

하루아침에 전시 성폭력을 근절할 수 있는 법을 통과시킬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는 우리 세대의 과제이다. 전시 성폭력을 근절하려면 정부, 시민, 사회가 모두 협력해 이 방대한 국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새로운 모델을 모색해야 한다. 우리는 전시에 성폭력이 무기로 사용되는 잔혹함을 근절할 수 있다. 그 피해자가 사회적 외톨이가 아닌 용감한 생존자로 살아가도록 하는 것 역시 우리 손에 달려 있다.

※ 분쟁지역 성폭력 근절을 위한 국제회의(Global Summit to End Sexual Violence in Conflict)가 10∼13일 런던에서 열렸다. 존 케리 미국 국무장관 등 1000여 명이 참석했다. 이번 회의
의 공동의장을 맡은 앤젤리나 졸리(미 영화배우)와 윌리엄 헤이그 영국 외교장관이 전 세계
인의 관심을 촉구하는 공동기고문을 본보에 보내와 게재한다.

앤젤리나 졸리 미국 영화배우·윌리엄 헤이그 영국 외교장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