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271>어느 날 은행에 갔었네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6월 16일 03시 00분


어느 날 은행에 갔었네
―심보선(1970∼ )

어느 날 은행에 갔었네
애인과 나 손 꼭 잡고 통장을 만들었네
등 뒤에서 유리문의 날개가 펄럭거리네
은행은 날아가지 않고 정주하고 있다네
애인과 나는 흐뭇하다네
꿈은 모양이 다양하다네
우리는 낄낄대며 담배를 나눠 갖네
은행의 예절은 금연 하나뿐이라네
어쩐지 세상에 대한 장난으로
사랑을 하는 것 같네 사랑 사랑 사랑
이라고 중얼대며 은행을 나서네
유리문의 날개에는 깃털이 없다네
문밖에서 불을 붙여주며
애인은 아직도 낄낄거리네
우리는 이제부터 미래에 속한다고
미래 속에서 어른이 되었다고
애인이 나에게 가르쳐주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마음 아프네
금방 머리 위로 파산한 새가 날아갔네
후드드득
깃털 같은 빗방울들이 떨어지네
어느 날 우리는 많은 돈을 갖겠네


화자는 애인과 함께 통장을 만들러 은행에 간다. 두 사람은 앞날을 함께하기로 약속한 게다. 은행 유리문은 무겁다. 기세 좋게 열고 들어서자 ‘등 뒤에서 유리문의 날개가 펄럭거린단다’. 꼭 닫히기 전에 두어 차례 안팎 바람을 휘젓는 유리문이다. ‘꿈은 모양이 다양하다네’ 어떤 통장을 만들까. ‘사랑설계 적금’이랄지, ‘행복가득 저축’이랄지, 돈을 모아 미래를 구축할 꿈을 자극하려는 예금 이름들에 두 사람은 낄낄댄다. 설레기도 하고 쑥스럽기도 하고 왠지 뒤숭숭하다. 은행을 나서자마자 두 사람은 담배에 불을 붙인다. ‘은행의 예절은 금연 하나뿐이네.’ 그렇지, 검은돈이든 흰 돈이든 가리지 않으면서 ‘금연’이나 강조하는 세상의 도덕. 거기 돌입하려는 마당에 기껏 담배를 무는 것으로 반항의 몸짓을 하네. 애인은 ‘우리는 이제부터 미래에 속한다고’ 가르쳐주는데, 화자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문득 숨이 막히고 마음 아프다. 이게 내 정해진 미래인가? 가정을 이루고 돈이나 불리는 삶이? 죽지 묶이고 깃털이 죄다 빠져버린 새처럼 볼품없는 삶…. 화자는 그런 삶을 원치 않는 게다.

이 시가 실린 심보선 시집 ‘슬픔이 없는 십오 초’에는 대출 좀 받을 수 있을까 해서나 은행에 가는 사람들에게는 사치일 정신적 고뇌와 원초적 고독이 냉소적이면서도 기지 넘치는 시어로 한 상 잘 차려져 있다. 예컨대, ‘인사를 받으면 반드시 웃음을 거슬러 주는 것이 이웃 간의 정리’(시 ‘풍경’에서) ‘지구적으로 보자면, 그대의 슬픔은 개인적 기후에 불과하다네’ (시 ‘먼지 혹은 폐허’에서). 시인을 잘 타고난 시라는 생각이 절로 드는 시들이다.

황인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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