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의 사내들에 대해 중국인들은 “교만하고 방자하다(後稍驕恣)” “걸어 다니는 것이 달리는 것 같다(行步皆走)”라고 기록했다. 바꿔 말하면 동아시아 강대국답게 자의식이 강했고, 당당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고구려 여인들은 어땠을까. 역사 기록에 의하면 사내들 이상으로 위대했다.
● 주몽의 어머니 유화부인
고구려 건국신화와 관련 사료에 등장하는 최초의 여인은 주몽의 어머니인 유화(柳花·버들꽃)부인이다. 고구려 건국신화에 의하면 유화는 물의 신(神) ‘하백’의 딸이었다. 유화가 강에서 노는 모습을 보던 천제(天帝)의 아들 해모수는 첫눈에 반했다. 유화도 해모수를 사랑해서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혼약을 한다. 결혼이라는 중대한 결정을 할 때 온전히 자신의 선택으로 했다는 여성의 자의식을 반영하는 대목이다.
두 사람은 압록강가의 집에서 함께 살게 되었다. 그러나 해모수는 유화를 버려두고 하늘로 올라가 버렸다. 아버지는 이 모든 일이 자신의 말을 듣지 않은 탓이라며 딸 유화를 백두산 근처로 추방해버렸다. 혼자 버려진 그녀를 동부여의 임금이 궁으로 모셨다. 고구려 건국신화는 어두운 방에 거처하던 그녀의 배로 하늘에서 빛이 내려앉았고, 곧 태기가 생겼다고 전한다. 그리고 유화부인은 알을 낳았는데 그 알을 깨고 나온 아이가 훗날 고구려를 세운 주몽(활을 잘 쏘는 사람)이다. 광개토대왕 비문에는 주몽이 천제의 아들이고 하백(유화의 아버지)의 외손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주몽은 동부여 왕실에서 구박을 받으면서도 잘 자랐다. 그를 훌륭하게 기른 사람은 어머니 유화부인이었다. 유화부인은 어린 주몽에게 활쏘기를 권하고, 명마를 고르는 방법을 알려주는 등 훗날을 도모할 왕의 그릇으로 키웠다.
어느 날 동부여의 왕자와 형제들이 주몽을 시기하여 죽이려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유화부인은 주몽을 탈출시키면서 부인과 자식을 자신에게 맡기고 남쪽으로 가서 새로운 나라를 세우라고 명한다. 주몽은 어머니 말에 따라 남으로 가 기원전 37년에 고구려를 건국하였는데 그가 바로 동명성왕이다.
고구려에서는 유화부인을 ‘부여신’이라는 이름으로 모셨다. 국내성의 동쪽에는 국동대혈(큰 동굴)이 있는데, 임금들은 10월에 동맹(국가제사)을 지낼 때 이곳에 가서 부여신상을 수도로 모셔와 제사를 지냈다.
고구려와 당나라가 전쟁을 벌일 때 요동성이 점령당할 위기에 놓인 적이 있다. 이때 사당에 모셔둔 부여신상이 사흘 동안이나 피눈물을 흘렸다는 중국의 기록이 있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자유 의지로 사랑을 선택한 유화부인은 개인의 고난을 참아내면서 아들에게 고구려를 세우게 한 건국의 어머니였던 것이다.
● 주몽의 아내 소서노
고구려의 유화부인 다음 여인으로 소서노(召西奴)가 있다. 고구려 건국설화에 따르면 홀본부여(또는 졸본부여·卒本扶餘) 왕(귀족이라는 설도 있다)의 둘째 딸이었다. 홀본부여는 지금의 랴오닝(遼寧) 성 환런(桓仁) 지역으로 추정된다. 삼국유사는 ‘동명제(東明帝)가 북부여(北扶餘)에 이어 일어나 졸본주(卒本州)에 도읍을 정하고 졸본부여가 되었는데, 이것이 고구려(高句麗)의 시작이다(東明帝繼北扶餘而興 立都于卒本州 爲卒本扶餘 卽高句麗之始)’라고 기록하고 있다.
어머니의 명에 따라 동부여를 탈출한 주몽은 홀본부여에 당도했는데 주몽을 본 소서노는 그가 뛰어난 능력을 갖춘 인물임을 간파했다. 두 사람은 혼례를 올렸다. 주몽은 자연스럽게 홀본부여의 세력을 접수했다. 이것은 북부여 동부여 홀본부여가 갈등을 벌이는 과정에서 북부여계와 홀본부여계가 연합한 것이므로 일종의 혼인동맹과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두 사람 사이에서 나온 자식들이 바로 ‘비류’와 ‘온조’다(삼국사기). 주몽은 남만주 일대는 물론이고 압록강을 넘고 백두산, 두만강 하구까지 영토를 넓혔다. 이때 부인 소서노의 정치력 경제력 군사력이 절대적이었다. 소서노는 뛰어난 정치가였다.
주몽에겐 고향을 떠날 때 아들을 두고 왔는데 그가 바로 유리왕자였다. 그가 어느 날 아버지를 찾아온다. 주몽은 유리를 태자로 삼았는데 이는 자칫하면 차기 왕권을 놓고 비류, 온조와 피비린내 나는 권력쟁탈전을 예고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소서노는 남편과 두 아들, 의붓아들인 유리를 모두 살리고, 무엇보다도 이제 막 기틀을 잡아가는 고구려의 분열을 막아야만 했다. 절대권력의 중심에 있었던 소서노는 불확실성 속에서 지혜로운 결정을 내렸다.
이들에게 권력투쟁 대신 한반도 남쪽 지역의 신천지를 개척하게 하는 결정을 내린 것이다. 그녀는 아들들에게 “경기만과 서울지역을 장악한다면 큰 세력을 형성할 수 있다. 한강 물류망과 비옥한 농토를 이용하여 한반도의 남쪽을 장악할 수 있다”며 “중국 지역과 바다로 교류할 수 있고, 남북 연근해 항로를 이용하면 일본열도까지도 교류할 수 있으니 밖으로 나가 영토를 개척하라”고 했다. 비류와 온조는 각각 남으로 내려가 소서노의 지원에 힘입어 비류백제와 온조백제(위례성에 도읍지를 둠)를 건국해 시조(始祖)가 된다.
● 온달장군의 아내 평강공주
고구려의 세 번째 여인은 많은 사람이 알고 있는 평강공주다. 삼국사기 ‘온달전’에 평강공주에 관한 기록이 있는데 역사적 사실과 설화가 뒤섞여 있는 기록이 아닌가 추정된다.
평강공주는 평원왕의 공주이며 영양왕 영류왕의 귀여운 누이동생이다. 어릴 때 울보였던 그녀에게 평원왕은 “자꾸 울면 바보 온달에게 시집보내겠다”고 말하곤 했다.
훗날 성장한 평강공주는 귀족 집안과 혼인하라는 아버지의 지시에 대해 “임금의 말은 지켜지지 않으면 나라의 질서가 무너질 것”이라며 왕실을 나와 바보 온달과 혼인했다.
공주였던 그녀는 오두막에 살면서 장님인 시어머니를 지극정성으로 보살폈고 나무꾼인 남편에게는 말(馬) 사는 법을 알려주며 공부와 무예를 가르쳐 늠름한 전사로 만들었다. 그 바보 온달은 대장군이 되어 북쪽에서 침공해온 북주(北周)의 대군을 섬멸했다.
온달장군은 다시 남쪽 국경으로 출전했다. 죽령 이남의 영토를 수복하지 못하면 돌아오지 않겠노라는 선언을 남기고. 그는 신라군과 싸우다 아차산 전투 도중에 화살에 맞아 전사했다. 그런데 시신을 모신 관이 움직이지 않는 것 아닌가. 비보를 듣고 달려온 공주가 아차산까지 내려와 관을 어루만지자 비로소 움직였다고 한다. 온달은 고구려의 대장군이었다. 그 온달의 뒤를 이은 명장이 바로 을지문덕이다.
일찍이 고대에는 모계사회가 있었다. 모계사회에서는 여성, 어머니가 중심이었다. 자연히 우리 고대 역사에도 여신이나 여성과 관련된 이야기가 많이 전해진다. 오랜 세월이 지난 오늘날 여성들이 다시 많은 나라에서 남성 중심의 가부장제 관습을 깨고 지도자로 등장하고 있다.
모성은 평화 화해 포용 사랑 창조 교육 생태 치유 등 긍정적인 가치를 포함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모성 리더십은 미래형 리더십이다. 우리 역사 속 여성들을 재조명하는 일은 그래서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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