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8월 김병준 교육인적자원부 장관은 제자의 박사학위 논문을 표절했다는 의혹을 받았다. 교육부총리에 임명된 지 18일 만에 자진 사퇴하기까지, 그는 언론과 야당의 매서운 공세에 시달려야 했다. 국회 청문회에서 표절이 아니라고 주장했지만 여당인 열린우리당도 우호적이지 않았다. 노무현 정부 대통령정책실장을 맡으며 ‘강남 불패(不敗)라면 대통령도 불패’라는 부동산정책의 한복판에 그가 있었다. 여당에도, 야당에도, 언론에도 미운 털 박힌 대통령 최측근이었다.
1954년생 김병준은 1984년 미국 델라웨어대에서 정치학박사 학위를 받고 귀국해 강원대를 거쳐 1986년 3월 국민대 행정학과 교수에 임용됐다. 대구상고와 영남대 졸업, 국내 학맥으로만 본다면 한국사회 주류와 거리가 있다. 3년 차 교수, 33세의 미국 유학파 신진 학자로 김병준은 직장인 만학도(晩學徒)인 신모 씨의 박사학위 논문 지도교수가 됐다. 신 씨는 1987년 9월 설문과 면접조사로 얻은 데이터로 ‘도시재개발 지역주민의 정책 행태에 관한 연구-세입자를 중심으로’라는 논문을 썼다. 이 논문은 1988년 2월 심사를 통과했다. 이보다 석 달 앞서 김병준은 한국행정학회 연례 학술발표회에서 ‘도시재개발에 대한 시민의 반응-세입자를 중심으로’라는 논문을 발표하고 이듬해 6월 한국행정학회 한국행정학보에 게재했다. 시차상 제자 논문보다 늦게 출간됐다.
표절 의혹은 김병준 논문에서 제자가 수집한 400명 설문 면접조사 데이터를 그대로 썼다는 점에서 시작된다. 제자가 논문에 쓴 표 48개 중 5개가 김병준 논문에도 등장한다. 제자는 다중회귀분석을, 김병준 논문은 단순빈도분석을 돌려 통계처리 방법은 달랐다. 김병준은 “신 씨의 데이터 수집과 분석을 적극 지도했고, 논문 발표 전에 데이터를 사용해도 좋다는 동의를 얻었다”고 해명했다. 그래도 언론과 야당은 ‘구린내가 난다’며 의혹을 증폭시켰다.
당시 나는 언론과 야당의 문제 제기가 지나치다고 생각했다. 미국에서 갓 돌아온 소장 학자가 주경야독(晝耕夜讀)하는 제자 논문을 가로챘다는 주장은 상식과 동떨어진다. 지도교수가 박사과정 학생의 연구 설계를 지도하는 것은 기본이다. 아이디어 단계부터 자료수집, 통계분석, 결론에 이르기까지 교수와 협업해야 논문이 완성된다. 미국 유학까지 한 김병준이 신진 학자 때 고령의 제자 논문부터 베끼고 보는 비양심적인 교수였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하루아침에 제자 논문을 가로챈 ‘몰염치한’ 학자가 되면서 평온한 가정도 흔들렸다. 날만 새면 불거지는 의혹과 언론 공세에 부인이 병원에 실려 가기도 했다. 대학생인 두 딸은 “가족이 더 중요하다”고 눈물을 흘렸다. 김병준은 국회 교육위에 출석해 의혹을 조목조목 반박한 뒤 사표를 던졌다. 지인들은 “이대로 물러나면 학교에 돌아가서도 설 땅이 없다”며 만류했지만 뜻을 굽히지 않았다. 나중에 안 얘기지만 노 대통령은 버티라고 했지만 김병준은 “정권에 부담이 되는 것 같다”며 물러났다고 한다. 노 대통령은 앞서 2006년 4월 김병준을 총리로 지명하려다 열린우리당을 의식해 하루 만에 한명숙으로 바꿨다는 뒷얘기도 있다.
8년 전 일을 돌이키는 것은 김명수 교육부 장관과 송광용 대통령교육문화수석비서관의 논문 때문이다. 당시 한나라당은 김병준을 가리키며 “이런 사람이 교육 수장(首長)이 될 자격이 있느냐”고 공격했다. 김병준은 억울해 했지만 물러났다. 이제 박근혜 청와대와 새누리당이 답할 차례다. 두 사람 논문은 연구윤리와 한참 거리가 있다. 논문에 대한 기준을 이토록 높여 놓은 건 한나라당이었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