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민족의 미래 알고 싶다면 광개토대왕릉비를 보라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6월 24일 03시 00분


[윤명철 교수의 고구려 이야기]<14·끝>

윤명철 교수
윤명철 교수
광개토대왕릉비는 동아시아에서 가장 큰 비석으로 광개토대왕 서거 2년째 되던 해인 414년에 장수왕이 세웠다. 현재 지명으로 보면 중국 지린(吉林) 성 지안(集安)의 시청 소재지에서 동북쪽으로 약 4.5km 부근에 위치해 있다. 비의 서남쪽 약 300m 지점에 대왕의 능으로 추정되는 태왕릉(太王陵)이 있다.

현재는 1982년에 설치된 비각 안에 있으며 철책으로 둘러싸여 있는데 중국 당국은 최근 비각을 큰 유리로 둘렀다. 돌은 자연석으로 장방형 기둥 모양이다. 윗면과 아랫면이 넓고 중간부분이 약간 좁은 형태를 띠고 있고 무게는 37t 정도 된다. 글자는 1775자이며 이 중 150여 자를 읽을 수 없다.

조선의 학자들은 광개토대왕비에 대해 잘 몰랐다. 1447년에 쓰인 용비어천가에는 “평안도 강계부(江界府) 서쪽으로 강을 건너 140리쯤에 큰 벌판이 있다. 그 가운데에 옛 성이 있는데, 세상에서는 ‘대금황제성(大金皇帝城)’이라고 일컫는다. 성 북쪽으로 7리쯤에 비석이 있다”고만 적혀 있다. 1486년 성종 때 쓰인 동국여지승람에도 ‘세상에 전해오는 말로는 금나라 황제묘라 한다’고만 기록되어 있다.

그러다 1875년을 전후해서 중국인들이 광개토대왕비라는 것을 알았고, 일본은 1882년경 만주에서 정보를 수집하던 일본군 참모본부의 밀정인 중위 사카와가 비문을 탁본해서 일본으로 반출함으로써 알게 되었다. 그리고 몇 년 지난 1889년에 일본군 참모본부는 광개토대왕비를 조작한 해석문을 발표하였다.

그렇다면 장수왕은 무슨 목적으로 이 비를 세웠으며, 그것을 통해 알리고 싶은 내용은 무엇이었을까?

광개토대왕릉비 비문 중 변조 의혹이 있는 부분. 일본은 이 문구를 바탕으로 ‘임나일본부설’을 주장하며 조선을 식민지화하는 정책 도구로 활용했다.윤석하 작가 제공
광개토대왕릉비 비문 중 변조 의혹이 있는 부분. 일본은 이 문구를 바탕으로 ‘임나일본부설’을 주장하며 조선을 식민지화하는 정책 도구로 활용했다.윤석하 작가 제공
우선 고구려가 광대한 영토를 개척한 후 질서유지와 정통성 확립을 위해 세웠다고 보는 것이 정설이다. 비문 오른쪽 첫 구절에 ‘始祖鄒牟―出自 北扶餘天帝之子 母河伯女郞(시조추모―출자 북부여천제지자 모하백여랑)’ 즉 ‘시조인 추모는 북부여 천제의 아들이고, 어머니는 물의 신(神)의 따님이다’, 이어 다음 줄에는 ‘我是 皇天之子 母河伯女郞 鄒牟王(아시 황천지자 모하백여랑 추모왕)’ 즉 ‘나는 황천의 아들이고 어머니는 수신의 딸인 추모왕이다’라는 문장이 있다. 고구려의 시원을 설명하면서 천손 민족이라는 자의식을 선언하고, 부여에서 유래한 정통성과 원(고)조선 계승성을 아울러 표방한 것이다.

둘째, 광개토대왕이 22년 동안 벌인 정복활동과 영토들을 연대순으로 기록하면서 그 정당성을 표방하고 있다. 모든 정복활동이 하늘의 자손으로서 하늘의 뜻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셋째, 고구려의 사상과 시대정신, 미의식을 상징물의 형식을 빌려서 표현하고 있다. 비는 세워진 터(장소)부터 의미심장하다. 국내성은 고구려의 중심이다. 그곳에서 해뜨는 방향인 동쪽 들판 한가운데 평평한 곳에 동명왕의 신전일 가능성이 큰 장군총이 있다. 비는 그 장군총과 일직선으로 1650m 떨어져 있고, 압록강가에 있다. 풍수사상에서 보면 중요한 혈자리에 해당한다.

비는 형태, 색깔, 글자체, 글의 내용 등 모든 점에서 일반적인 비들과는 다르다. 크기가 유별난데, 높이가 6.39m로 3층 건물과 같다. 아랫변은 대체로 1.3m 정도인데, 위로 올라갈수록 폭이 두꺼워져 위로 솟구치는 형국이다. 꼭대기도 왼쪽이 더 높아 역동성을 또 한번 강조하고 있다. 거대함과 웅장미를 갖춘 부피만으로도 고구려가 강대국임을 과시한다.

모양도 통념을 깬다. 전체적으로는 직육면체의 꼴을 갖추었지만 네 면이 반듯하지 않고 틀어진 듯 엇갈렸다. 네 개의 모서리도 직선이 아니라 불규칙한 곡선에 가깝다. ‘각력응회암’이기 때문인지 글자를 새긴 표면도 거칠고 울퉁불퉁하다. 글자체는 웅혼하지만 권위적이지 않고 오히려 소박하다. 화강암이나 오석처럼 순도 높은 단색의 석재가 아니라 한 덩어리의 자연석을 약간 다듬어 글씨를 새긴 후에 마치 심은 듯 세워 놓았다.

광개토대왕릉비의 최근 모습. 건물 안쪽에 보관돼있는 것이 광개토대왕릉비다. 중국 지린 성 지안 시 동북쪽에 있다. 윤명철 교수 제공
광개토대왕릉비의 최근 모습. 건물 안쪽에 보관돼있는 것이 광개토대왕릉비다. 중국 지린 성 지안 시 동북쪽에 있다. 윤명철 교수 제공
장수왕은 이 비를 고구려가 정복한 여러 종족들을 통합하고 화합하기 위해 세웠을 것이다. 광개토대왕이 정복전쟁을 벌여 만주 일대와 한강 이북, 동해와 서해의 중부가 고구려의 영토가 되었다. 다른 자연환경 속에서 다른 문화를 가꾸며 살아온 여러 종족들이 고구려인이 되었다. 지금의 미국이나 중국처럼 다민족 국가가 된 것이다.

하지만 그들 간에는 신분과 종족의 차별감도 생기고, 문화의 갈등과 충돌도 발생했을 것이다. 북방종족들이나 한족들과 경쟁체제에 있는 고구려로서는 강력한 통일 공동체여만 승리할 수 있고 평화를 누릴 수 있다. 신흥 제국들은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할 때 권력과 법치, 군사력, 고도의 이데올로기를 이용하는 지배 방식을 택했다. 고구려도 마찬가지였다. 모두가 상생하고 조화롭게 사는 방식을 택한 것이다.

사실 이는 원조선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한민족이 지녀온 사상이다. 이질적인 종족과 문화들을 고구려라는 용광로에서 녹여내고 공동체를 이룩하려면 적합한 시대정신과 사상을 찾고, 공동의 문화를 창조하며, 국가의 시스템도 개조해야 한다. 또한 이를 전파하고 교육하는 특별한 상징물이 필요했던 것이다.

장수왕은 고구려의 재도약을 통해서 고구려의 위상과 역할을 전환시키고자 했다. 따라서 아버지의 업적과 역사뿐만 아니라 자신과 신고구려가 추진해야 하는 국정지표, 시대정신, 동아시아 세계와 미래에 전달하려는 의미를 모두 담아 놓았다. 그것은 자의식과 자랑스러운 역사, 그리고 세계는 평화롭고 상생해야 한다는 조화의 논리로 압축된다. 그래서 비는 피정복민에게 과시하는 권력의 상징물과 달리 웅장하면서도 소박미가 있고, 합리적이면서도 비정형적인 형태미, 역동적이면서도 정적인 사유미가 담긴 웅장한 형태를 택했다.

그런데 비문은 훼손돼서 상태가 좋지 않고, 표면이 울퉁불퉁해서 글자를 해독하는 데 어려움이 많았다. 일본은 비문을 훼손해 ‘임나일본부설’ 등을 유포하면서 조선을 식민지화하는 정책 도구로 활용하였다. 하지만 동아시아의 국제관계와 고구려가 벌인 정복활동을 고려하면 일고의 가치도 없다. 이 무렵에 왜국은 핵심지역조차 통일을 못한 소국들의 집합체였을 뿐이다. 게다가 일본은 그때까지 가야 백제 고구려 신라의 강력한 영향력 아래 있었다.

고구려는 동아시아 역사에서 700년 동안 자존심을 지키면서 강국으로 존재한 나라다. 당시 중국은 5호 16국으로 분열되어 있었고 고구려는 이런 정세를 활용하여 큰 영토를 차지한 동아시아 최강대국이었다. 어쩌면 우리 민족 역사에서 가장 화려한 시절이라 할 수 있다.

그랬다. 고구려는 대륙과 바다를 지배했고 중국과 일본에 막강한 영향력을 미쳤으며 군사 정치 경제 문화 예술 학문 등 모든 분야에서 선진국이었다. 고구려는 한민족의 살아있는 역사이고 원형(原形)이며 기상이다. 지금 고구려의 피가 우리 몸속에 흐르고 있다. 남북 교류와 통일을 통해 해양과 대륙을 연결하고 이를 다시 한민족 웅비의 에너지로 만드는 것, 이것이 대한민국의 지상과제라고 모두들 말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자신감을 가져도 된다. 왜냐고? 고구려라는 살아있는 역사가 있기 때문이다. 올해는 광개토대왕비가 건립된 지 1600주년 되는 해다.

윤명철 교수
#장수왕#광개토대왕릉비#중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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