쓴소리가 듣고 싶었다. 새벽잠을 참아가며 브라질 월드컵을 지켜본 국민이라면 누구나 비슷한 심정 아니었을까. 한국 축구는 1무 2패의 초라한 성적으로 16강 진출에 실패했다. 한국 축구의 야인으로 불리는 김호 전 대표팀 감독(70). 고졸(동래고) 출신인 그는 한국 축구의 적폐라고 할 수 있는 ‘라인(인맥)’ ‘파벌’ 등과 줄기차게 맞서며 성공한 선수와 지도자로 한 시대를 풍미했다. 1994년 미국 월드컵에서 2무 1패라는 호성적을 거뒀던 그의 지도력이 20년이 흐른 요즈음 재조명되고 있다. 홍명보 현 대표팀 감독은 김 감독 밑에서 선수로 뛰었다.
○ 예견된 결과
지난 주말 서울 송파구의 한 커피숍. 고향 경남 통영시에서 몇 년째 손자뻘 되는 유소년들을 지도하다 상경한 백발의 노감독과 마주했다. 김 감독은 “국가대표팀은 선수를 가르치는 곳이 아니라 효율적으로 쓰는 곳”이라며 말문을 열었다. 브라질에 갔던 태극전사가 최상의 실력을 가진 상태는 아니었다는 의미였다. “월드컵은 경험하는 자리가 아니라 증명하는 자리”라는 이영표 TV 해설위원의 총평과도 일맥상통하는 대목이다. “월드컵을 치르면서 감독이 세 번이나 교체됐다. 짧은 준비 기간에 올림픽 출전 멤버 위주로 구성되다 보니 여건이 안 좋았다. 단기전에선 체력과 조직력이 중요한데 아쉬움이 많다.”
김 감독은 축구대표팀 전임 지도자 1호로 1994년 월드컵을 지휘했다. 본선에 앞서 ‘도하의 기적’을 일으켰다. 한국은 월드컵 최종 예선전에서 북한을 이긴 뒤 같은 시간 일본과 이라크가 비겨야 본선 티켓을 따내는 절박한 상황이었다. 한국은 북한을 3-0으로 누른 뒤 경기 막판까지 1-2로 뒤지던 이라크가 후반 추가시간 3분에 동점골을 터뜨려줘 극적으로 3회 연속 월드컵 본선에 나갈 수 있었다. 김 감독은 “당시 대표팀은 축구협회장의 교체에 고참 대거 은퇴 등 악재가 많았다. 하지만 아시아를 대표해 뭔가를 보여줘야 한다는 투지만은 대단했다”고 말했다. 20년 세월을 오가던 그는 “힘들었던 기억은 가슴에 잘 새겨야 한다. 추억이 아니라 교훈이 돼야 하는 이유다. 같은 실수를 반복해서는 안 된다”고 조언했다.
아시아 맹주라던 한국 축구가 그의 눈에는 신기루처럼 보였는지 모른다. “한국이 2000년대 들어 월드컵에서 좋은 성적을 냈어도 정상적인 축구 발전은 없었다. 프로 축구는 30년 넘는 역사를 지녔지만 선수 육성, 리그 운영, 관중 동원 등에서 여전히 후진적이다. 해외 진출 선수를 주축으로 세계 축구를 이기려고 하면 한계가 있다. 뿌리가 되는 국내 리그부터 활성화해야 한다.” 정부와 기업의 관심, 대한축구협회의 행정력 등에서 개선될 여지가 많다는 게 그의 충언이었다. “축구 발전은 하루아침에 이뤄지지 않는다. 10년 이상의 장기 설계가 절실하다.”
○ 답은 현장에 있다
국가대표 수비수로 8년을 뛴 김 감독은 1970년대 중반 은퇴 후 40년 가까이 고교, 실업팀, 프로 지도자를 두루 거쳤다. 삼성 감독을 맡던 1999년 주요 대회 우승을 휩쓸며 4관왕에 올랐다. K리그 최다 경기 출장 기록(541회)도 갖고 있다. 통산 최다승 2위(207승). 장수 비결을 묻자 김 감독은 “10년 넘게 경기장이 내 집이었다. 지도자들이 실패하는 주된 원인은 운동장에 나오지 않아서”라고 했다. 그러면서 “남들이 가르치는 것도 보고 선수들 뛰는 것도 관찰했다. 그렇게 얻어진 자료를 통해 훈련 계획을 짜고 미래 설계도 했다. 어느 팀을 맡으면 적어도 5년 뒤를 내다봤다”고 설명했다. 1970년대 후반부터 빚을 내서라도 해마다 유럽 축구 연수를 떠났다. “주로 독일 분데스리가를 갔다. 선진 축구의 훈련 방식, 시스템을 공부했다. 투자 없이는 어떤 성과도 나올 수 없다.”
김 감독의 양쪽 손등은 피부에 흰 반점이 생기는 백반증으로 허옇게 얼룩져 있었다. 기자의 시선을 의식한 그는 “삼성에 있을 때 걸렸는데 약이 없다”며 웃었다. 삼성은 김 감독이 맡았던 8시즌 동안 국내외에서 13차례나 우승했다. 화려한 성적의 뒤에는 극심한 스트레스와 싸워야 했던 애환이 있었다. 당시 그의 숙소에는 브라질, 이탈리아, 스페인 리그의 비디오테이프가 빽빽이 차 있었다. 경기가 없으면 하루 종일 방에 틀어박혀 새로운 전술을 연구했다. 현장에만 안 갔다 뿐이지 모든 경기를 안방에서 챙긴다는 얘기까지 나왔다.
○ 내가 아닌 누군가의 꿈을 키우는 존재
김 감독이 50년 전 명문대 스카우트 공세를 뿌리치고 은사가 감독을 맡은 제일모직에 입단한 건 유명한 일화다. 학맥, 지연 등 연줄에 따라 선수 및 감독 선발뿐 아니라 개인상 수상자까지 좌지우지하는 한국 축구에서 그는 고독한 승부사였다. “스승을 믿고 내 갈 길을 갔기에 한 번도 후회하지 않았다. 대표팀에 처음 들어갔더니 외톨이였다. 모든 걸 실력으로 이겨내야 했다. 남이 쉬거나 놀 때 나는 뛰었다.”
2남 1녀의 막내였던 김 감독은 1967년 태극마크를 달고 베트남 국제대회에 출전했다 청천벽력 같은 비보를 접했다. 육사를 거쳐 베트남전에 정보장교로 참전했던 다섯 살 터울의 형이 흉탄에 눈을 감은 것이다. 대회 끝나고 만나자던 형과의 약속은 이뤄지지 않았다. “대회 도중 달려가 수습을 한 뒤 돌아가 결승을 뛰었다.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어 슬퍼하시지 말라고 했다. 내가 모든 걸 다하겠다고 했다.” 성공하기 위해 독해졌던 그는 “시련과 설움 덕분에 더 강해졌다”고 하면서도 목소리는 잦아들었다. 6월이면 항상 입는다는 검은색 티셔츠 차림은 기자 앞에서도 달라지지 않았다.
축구장 안팎에서 거친 세파에 시달렸던 김 감독은 “고향에서 봉사하는 마음으로 어린 선수들을 가르치고 있다. 누군가가 꿈을 이루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하고 싶다. 꿈은 아름다운 거 아닌가”라고 했다. 저녁 식사로 이어진 2시간 넘는 만남을 마치면서 “그래도 한국 축구 잘봐 달라”며 잔잔한 미소를 건넸다. 처음엔 날 선 일침을 기대했지만 인터뷰를 녹음한 음성 파일을 다시 들어보니 온기가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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