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약국들은 대부분 영세하다. 미국의 CVS파머시, 두에인리드 등의 ‘드러그 스토어’들과 비교해 보면 규모의 영세함이 분명히 드러난다. 작은 약국이 약사들에겐 낭만적일지 모르지만 필자 같은 소비자는 달갑지 않다. 약국의 규모가 작을수록 약값은 비싸기 때문이다.
아쉽게도 우리나라 약국은 규모가 커지기 어렵다. 약사 개인만이 약국을 개설할 수 있을 뿐 법인약국은 허용되지 않기 때문이다. 약사법 제20조 1항은 ‘약사 또는 한약사가 아니면 약국을 개설할 수 없다’는 내용이다. 약사법 제21조 1항은 ‘약사 또는 한약사는 1개소의 약국만을 개설할 수 있다’는 내용. 이에 따르면 자연인 약사 1명이 약국 1개만을 개설할 수 있고 약사끼리 함께 약국을 개업하는 것도 불법이다.
법인약국 금지 조항은 약사들 대부분이 지지한다. 약국들 사이에 가격 인하 경쟁이 생기는 것을 원치 않기 때문일 것이다. 법인약국 금지 조항은 일종의 담합 장치인 셈이다. 그러나 모든 약사가 담합에 동참했던 것은 아니다.
K라는 어느 약사가 새로운 형태의 약국을 운영하기 시작했는데, 위 약사법 조항의 제재를 받았다. K 씨는 이 조항이 직업선택의 자유 등 헌법상의 기본권을 침해한다며 헌법소원을 제기했고 헌법재판소는 K 씨의 손을 들어줬다. 변호사가 로펌을 만들고, 회계사가 회계법인을 만드는 것이 헌법상의 기본권에 속하듯이 약사에게도 약국법인을 만들 자유와 권리가 있다고 판단했다. 2002년 약사법의 법인약국 금지 조항은 헌법이 규정한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하는 법률이라며 헌법불합치 판결을 받았다.
그런데 이 법인약국 금지 조항이 아직도 그대로 방치돼 있다. 약사들과 시민단체들은 헌법에 어긋나는 법을 지지하고 있으며, 공무원과 국회의원들은 법 개정을 미루는 위헌적인 직무유기를 지속하고 있다.
약사들이 법인약국 설립을 반대하는 이유는 대략 이렇다. 의약업이 거대 자본에 종속되면 동네약국이 사라져 소비자는 불편해지고, 대형약국은 수익을 내려고 약사에게 의약품 판매를 종용해 약품 오남용이 심해지며, 결국 법인약국의 독점으로 그들이 비싸게 부르는 약값을 치러야 한다는 것이다.
소비자로서 그들의 주장은 납득하기 어렵다. 법인약국이 제약회사로부터 약을 대량으로 구매하면 단가가 낮아져 소비자는 더 저렴하게 약을 구매할 수 있을 것이다. 로펌, 회계법인, 의료법인 중엔 독점이 없는데 유달리 약국법인에선 독점이 나올 수 있단 논리는 어디서 비롯되는가. 또 개인약국에나 법인약국에나 의약품 오남용의 위험성이 있기는 마찬가지다.
외국에선 약사들로 구성된 법인약국 개설을 대부분 허용하고 있다. 뉴욕의 경우 마트 내에 약국을 두는 것이 보통이고 24시간 영업하는 약국도 많다. 우리나라도 대형마트나 편의점에서 약사가 약을 조제해줄 수 있다면 소비자의 약국 접근성과 편익은 커지고 약사들은 새로운 형태의 판로를 하나 더 갖게 될 것이다. 법인약국을 통한 규모의 경제는 신약 개발로 이어질 수도 있다. 그러나 약사법이 이를 불허하고 있다.
법인약국 개설을 반대하는 근거를 조목조목 따져보면 결국 기존의 개인약국들이 ‘동네약국’, ‘재벌’, ‘독점’ 등의 구호에 기대 가격 경쟁을 회피하려는 의도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이 문제는 개인약국이나 법인약국이 아닌, 어디까지나 소비자들을 기준으로 접근해야 한다. 지금이라도 약가 인하 경쟁이 벌어지도록 법인약국 개설을 허용해야 한다.
정부는 언제까지 약사들의 눈치를 보고 소비자인 국민 다수의 이익을 외면하며 위헌 정책을 유예하려는지, 국회엔 헌법에 따라 약사법 일부를 개정할 의지가 있는 의원이 정녕 한 사람도 없는지, 약사들은 법인약국 금지 구호에 매달려 아무것도 바꾸지 않으려는 태도를 계속해서 고수할 건지, 무엇보다 우리 스스로가 서서히 달궈지는 가마솥에 가만있는 개구리처럼 소비자의 권리를 침해당하는 데 그저 익숙해진 건 아닌지 숙고해볼 문제다.
※컨슈머워치는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고정관념에서 탈피해 소비자 입장에서 생각해볼 거리를 던지자는 취지입니다. 논쟁을 풍부하게 하는 차원에서 반론기고 환영합니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