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지로 웃음을 짓고 억지로 귀향의 기쁨을 꾸미는 표정으로 작별을 고하였다.’ 1959년 12월 15일자 동아일보 3면 일본 니가타(新潟)발 기사의 한 구절이다. 기사는 이어진다. ‘그들은 장래에 대한 불안감을 감출 수는 없었다.’ 기사 속에서 웃는 한편으로 불안해하는 것으로 묘사된 이들은 ‘다수의 부녀자들과 아동들’이었다.
이 기사는 최초의 북송선이 출항을 기다리는 모습을 전하고 있다. 승객들은 북한을 향해 출발하는 재일한인 1진. 이 해 시작된 북송사업은 1984년 막을 내린다. 이 기간에 모두 9만3000명이 넘는 이들이 일본을 떠나 북한 청진항 등에 발을 내디뎠다. 한국은 북송 또는 강제송환이라고 표현했지만 일본이나 북한은 귀환 또는 귀국이라고 했다.
북송사업에 앞장선 기관은 일본적십자사와 조선(북한)적십자회였다. 두 기관은 첫 북송선이 물살을 가르기 4개월 전 인도 콜카타에서 재일한인 귀환협정을 체결했다. 국제적십자사위원회가 중간에 다리를 놓았다. 적십자 기구 3곳이 전면에 나섰기 때문에 북송사업에는 ‘인도주의 포장’이 씌어졌다. 낯선 타국을 떠나 조국에서 새로운 삶을 개척하겠다는 소망을 지원한다는 명분이 힘을 얻었다.
6·25전쟁 후유증으로 일손이 모자랐던 북한도 적극 화답하고 나섰다. 주택과 식량을 주고 교육과 의료도 제공한다고 선전했다. 물론 이 모든 것은 무상이라는 점이 강조됐다. 재일한인들은 거의 모두 일제강점기에 먹고살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갔다. 차별과 빈곤에 시달리다 보니 귀가 솔깃해질 수밖에 없었다. 어차피 해야 하는 고생이라면 내 나라를 위해 헌신하겠다는 순수한 결심도 작용했을 것이다.
하지만 일본적십자사를 뒤에서 지휘한 인사는 따로 있었다. 바로 기시 노부스케(岸信介) 총리였다. 만주국에서 상공장관 등을 지내며 ‘산업개발 5개년 계획’을 주도했고 제2차 세계대전 뒤에는 A급 전범 용의자로 기소됐다 풀려난 뒤 총리에까지 오른 인물이다. 기시 총리는 이승만 대통령이 북송사업을 극력 반대하자 우회 전략으로 인도주의를 강조하라고 지시했다. 일본적십자사가 제2의 외무성으로 불리던 시절이었다.
일본은 재일한인들을 골칫거리로 여겼다. 2차 대전이 끝나고도 일본에 남은 한인들이 60만 명을 헤아렸다. 일본은 이들을 공산주의와 연결된 불온세력으로 봤다. 가난한 한인들에게 생계비를 지원해야 하는 점도 패전에서 가까스로 일어서려는 일본으로서는 큰 부담이기도 했다. 사실 북한으로 향한 재일한인들 거의 대부분은 친인척이 남한(한국)에 있었다. 고향이 한국이라는 말이다. ‘귀향’이라는 표현이 맞지 않는 이유다. 그렇지만 일본은 ‘한반도 전체가 재일한인들의 고향’이라는 억지논리를 폈다. 게다가 북송된 이들 중에는 일본인도 6700명 넘게 포함돼 있었다. 재일한인들과 결혼한 배우자나 가족들이다. 결국 기시 정부는 없어져버렸으면 하는 재일한인들을 쫓아내며 동포들까지 포기한 셈이었다. 인도주의 포장지를 한 꺼풀 들추면 추방이나 다름없는 속살이 드러난다.
첫 북송선이 출항하고 55년이 지난 2014년 기시 총리의 외손자인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가 인도주의의 깃발을 넘겨받았다. 아베 총리는 북한과 일본인 납북자 조사에 합의하면서 대상에 일본인 배우자도 집어넣었다. 외할아버지가 몰아내다시피 한 동포를 반세기가 넘게 흐른 뒤 되찾겠다고 나선 것이다. 아베 총리의 인도주의를 의심할 생각은 조금도 없다. 외할아버지의 잘못을 늦게나마 수습하려는 의지도 평가할 만하다. 다만 아베 총리가 인도주의 잣대를 자국의 납북자 문제에만 적용하지 않았으면 한다. 이웃나라인 한국과 중국에도 똑같은 잣대로 해결해야 할 사안들이 적지 않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