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옥판선지 속 빛 같은 문기(文氣) 어린 공중 거기 해거름 낮달 한 채 양각으로 돋아 있다. 허공은 무젖은 화첩, 숨결소리 들려온다.
#2. 이따금 비늘구름 미점산수(米點山水) 그려놓고 풋잠 깜박 들었다가 한껏 부푼 구름 일가(一家) 빛바랜 수월관음도가 저 달 위에 내걸린다.
#3. 목화구름 반쯤 비낀 하늘 가녘 벗겨나 내고 소리 먼저 길을 트는 금시조가 나는 건지, 때로는 십이파필(十二把筆)* 긋고 항적운이 번져간다.
#4. 앙감질 하다 말고 일몰 또한 멈칫거리는 만 리 밖 적막을 흩는 안항(雁行)의 그림자들 화첩 속 일흔 낱 이생이 꿈결엔 듯 머흘다.
*붓끝이 열두 갈래로 갈라지게 하여 그리는 동양화 의 필법
서른을 갓 넘긴 여름이었다. 여럿이 어울려 제주도에 갔는데 태풍이 막 지난 참이라 여행객들이 드물었다. 나보다 나이 어린 여성인 한 일행의 취미가 시조창이라고 했다. 수풀 무젖은 한라산 자락을 걸으면서 그녀가 시조창 한 자락을 불렀던 생각이 난다. 팝송이나 좋아했던 내 귀에는 낯설고 특이하게 들렸다. 동네 약수터에 가면 아카시아 그늘에서 목청을 돋우어 길게 소리를 뽑는 노인이 있었는데, 그 소리가 시조창이었다는 걸 그제야 알았다. 원래 시조는 창(唱), 노래로 불렸다. 그것이 운(韻)은 있지만 멜로디는 없는 한시(漢詩)와 다른 점이다. 그걸 염두에 두고 이 시조를 소리 내어 읽어본다. ‘옥파선지, 속 빛 같은, 문기 어린, 공중 거기’, 아무래도 나는 구태의연하게 호흡이나 끊어 평이하게 읊조린다. 내가 워낙 과문한 소치다. 아무려나 현대시조는 옛시조에서 중요했던 음악성에서 자유로워졌다. 현대시에 밀려 쇠퇴하는 시조에 고유의 음악성은 귀한 자산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비늘구름 목화구름 떠도는데 ‘낮달 한 채 양각으로 돋아 있는’ 해거름 하늘에서 화자는 ‘빛바랜 수월관음도’를 보고, 비행기 지나가며 남긴 자국을 보고, 기러기 떼 행렬도 본다. 하늘 풍경을 좇는 유유함이 ‘화첩 속 일흔 낱 이생이 꿈결엔 듯 머흘다’로 아연 긴장을 띠며 맺어진다. ‘머흘다’는 ‘사납고 험하다’는 뜻의 순우리말이다. 그 궂었던 한생이 꿈결 같구나! 잠시 시간에 이생 칠십 년이 겹치는 화첩 한 폭. 전아(典雅)한 의고체 표현으로 생에 대한 아릿한 감회를 부르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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