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주 주제는 도덕을 잘 지키는 사회가 배신이 적어 사회 응집력이 커진다는 거였습니다. 이번 주 주제는 도덕심을 강화시키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까입니다. <오피니언 편집자> 》
통념과 달리, 도덕심은 재산에 대한 애착에서 비롯했다. 재산은 생명체들이 만든다. 무생물들은 재산을 만들지 않는다. 생명체들은 재산이 삶에 도움이 되므로 그것을 만든다. 눈에 잘 뜨이는 예는 동물들이 만드는 고치나 둥지다. 사람도 재산 목록 1호가 집이다. 생명이 깃든 육신과 그것의 생존을 돕는 재산 사이엔 뚜렷한 경계가 없다. 재산은 확장된 육신이라 할 수 있다. 당연히, 생명체들은 자신의 재산을 지키려 애쓴다.
동물들이 둥지와 그 둘레 땅을 자신의 재산으로 여기는 ‘영역성(territoriality)’은 전형적이다. 산책길에서 애완견들이 소변으로 영역을 표시하는 행태는 그런 본능의 강렬함을 보여준다. 어린애가 맨 먼저 외치는 소리가 “그거 내 거!”라는 사실도 재산에 대한 애착이 본능적임을 보여준다. 재산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어 갖는 것은 자란 뒤에 교육을 통해 얻는 것이다. 모든 사회에서 도둑질을 벌한다는 사실은 재산에 대한 존중이 우리의 천성임을 증언한다.
재산은 생존에만 필요한 것이 아니다. 사람이 정체성을 얻고 다른 사람들과 사귀는 데에도 필수적이다. 사람은 ‘자기 것’을 통해서 자신의 정체성을 만들어낸다. 어린애들이 닳은 담요나 너덜너덜해진 인형에 큰 애착을 지니는 것은 자신의 정체성의 한 부분이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의 공동체 키부츠에서는 되도록 많은 것들을 공유하라고 배운 청소년들이 오히려 성인이 되어 다른 사람들과 사귀는 데 애를 먹는다고 한다. 그래서 헤겔은 재산의 소유를 “현상계에서 인간이 자신을 실현하는 방식”이라고도 했다.
○ 재산에 대한 애착에서 시작된 정의
재산이 이렇게 중요하니 그것에 대한 권리인 재산권은 가장 근본적인 제도라고 할 수 있다. 사회철학은 본질적으로 재산권에 관한 이론들이고 사회 체제들은 재산권의 모습이 구체화된 것이다. 거의 모든 사회에서 재산권의 바탕은 재산의 형성에 대한 공헌이다. 재산을 만드는 데 공헌한 사람들이 그 공헌 정도에 따라 그것에 대한 권리를 갖는 것이다. 공산주의조차 이 기준을 따르니, 마르크스를 비롯한 모든 사회주의 사상가들도 재산권은 재화를 생산한 노동자들에게 귀속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재산을 공동으로 소유했다고 여겨지는 원시 사회에서도 이 기준은 지켜진다. 사냥에서 짐승을 잡은 사람이 그 고기를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동물들도 이 기준을 따른다. 자기가 지은 둥지는 자기 것이고, 남이 지은 둥지는 남의 것이다.
사정이 이러하므로 재산권에 대한 침해는 거센 분개를 불러내는 게 당연하다. 동물들의 영역성엔 한계가 있지만, 사람은 더 심해서 때로 애국심이라는 형태로 극대화한다.
재산권의 침해에 대한 분개야말로 정의감의 원초적 형태였다. 자기가 힘들여 마련한 재산을 남이 차지하는 것은 세상 이치에 어긋난다고 우리는 어릴 적부터 느낀다. 다른 고등 동물들도 이런 원초적 정의감을 보인다. 원숭이들은 자신이 동료들보다 나쁜 대우를 받으면 분개한다. 그러나 그들은 다른 원숭이가 차별 대우를 받는 것엔 마음을 쓰지 않는다.
지난주에도 언급했지만 상호적 이타주의가 혈연을 보완하는 원리가 되자 정의감은 더욱 강렬해졌다. 배신해서 당장의 큰 이익을 노리는 사람은 사회의 응집력을 해치는 존재가 되었고, 당연히 강력한 제재를 받았다. 아울러 정의감은 훨씬 세련된 모습으로 진화했다. ‘나를 부당하게 대우하는 것은 참을 수 없다’는 수준을 넘어 ‘모든 사람들이 공평한 대접을 받아야 한다’는 모습으로 다듬어졌고, 그런 정의감은 상호적 이타주의를 더욱 확고하게 만들었다.
이처럼 재산에 대한 애착에서 비롯한 정의감이 바로 도덕심의 핵심이다. 어려운 도덕적 문제에 부딪쳤을 때, 우리는 바로 ‘무엇이 정의로운가?’라고 묻는다. 정의롭지 않은 도덕심이나 도덕률을 우리는 상상할 수 없다. 그리고 진화를 통해 정의감은 모든 인류가 공유한다. 실제로 모든 사회의 윤리 규범들과 모든 종교의 계명들은 본질적으로 같다. 인간들이 도덕적 ‘문법’을 공유하고 필요에 따라 도덕률을 만들어내 온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 자본주의의 정의로움
자본주의는 한마디로 재산 형성에 공헌한 사람들에게 재산권이 주어지는 체제이다. 사람들은 흔히 자본주의는 효율적이지만 정의롭지는 않으니 바꿔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런 얘기를 들을 때, 우리는 이렇게 되물어야 한다. “정의롭지 않은 사회가 어떻게 효율적일 수 있을까?”
자본주의를 수술하려는 시도들은 많았지만, 그런 시도들이 만든 사회들은 한결같이 정의롭지도 못했고 효율적이지도 않은 것으로 판명되었다. 재산권을 보장하지 못하면 정의도, 자아의 실현도, 효율도 기대할 수 없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도덕이란 개념이 자본주의 사회와 전체주의 사회에서 다른 뜻으로 쓰인다는 사실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도덕은 객관적으로 존재한다. 정의감에 바탕을 두고 도덕률과 법이 만들어진다. 여기에 어긋나지 않는 한, 다른 사람들 간섭을 받지 않고 자신이 마련한 재산을 자신이 원하는 목적에 쓸 수 있다.
하지만 전체주의 사회에선 지도자가 제시한 사회적 목표에 모든 자원들이 동원된다. 개인들의 재산권이란 게 있을 수 없다. 자연히, 도덕도 성격이 바뀐다. 지도자가 제시한 목표에 도움이 되면 어떤 행위든 도덕적이고, 도움이 되지 않으면 부도덕하다. 도덕이 객관성을 잃은 것이다. 이러다보니 전체주의 사회에선 객관적 도덕에 바탕을 둔 ‘절차적 안정성(procedural stability)’이란 게 없다. 어제의 영웅이 오늘의 역적이 되고 작년의 진리가 금년엔 허위가 된다. 객관적 도덕이 없으니, 지도자의 행위들은 무조건 정당화된다. 전체주의 사회를 장악한 지도자들이 예외 없이 황음무도해지고 사회주의 혁명을 기도한다는 세력이 으레 부도덕한 집단으로 타락하는 것은 그런 사정 때문이다.
○ 허물어진 우리 도덕
도덕은 이렇게 중요하다. 지금 우리 사회 응집력이 약해진 것은 이처럼 중요한 도덕이 허물어졌기 때문이다. ‘세월호’ 참사에 관련된 사람들 대부분 자신들의 자그마한 이익이나 편안함을 위해 당연히 해야 할 일들을 소홀히 해서 다른 사람들을 위험한 처지로 몰아넣지 않았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허물어진 도덕을 걱정하는 목소리는 좀처럼 들리지 않는다. 정치적 책임을 묻고 제도를 바꾸는 일에만 매달린다. 도덕이라는 바탕이 허술한데, 어떻게 튼튼한 제도가 세워질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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