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고향인 강원도 H군에 전원 터를 마련한 A 씨(54)는 그해 가을 화려한(?) 귀환을 했다. 도시에서 사업을 일궈 꽤 성공한 뒤 어머니 품속 같은 고향마을에 번듯한 집을 짓고 전원생활을 시작한 것. 마을기금도 듬뿍 내고 각종 마을행사 때마다 적지 않은 협찬을 했다. 그러나 A 씨는 지난해 고향마을을 다시 등졌다. “(마을주민들이) 정착을 도와주기는커녕 갈수록 돈만 요구해 정나미가 떨어졌다”는 게 그 이유다.
이처럼 역귀농·역귀촌의 그늘에는 생활 유지를 위한 소득 문제 못지않게 지역주민의 텃세 문제가 깊숙이 자리 잡고 있다. 고향마을에서조차 정착하지 못해 다시 떠난 A 씨의 사례는 극단적인 경우라기보다는 그만큼 시골텃세의 뿌리가 깊고도 질기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그렇다고 해서 시골텃세를 마을주민들의 악습으로만 몰아세울 일은 아니다. 사실 도시 직장인들도 다른 회사로 자리를 옮기거나 직종을 바꾸게 될 때, 대개는 이와 비슷한 텃세를 경험하지 않는가.
개인을 중시하는 도시의 가치와 공동체를 앞세우는 농촌의 가치는 수시로 부딪친다. 각자 그 안에서만 살아온 사고방식과 생활양식이 굳어진 탓에 텃세란 어찌 보면 불가피한 측면도 있다. 이질적인 도시문화와 시골문화의 충돌로 인한 갈등의 표출이기 때문이다.
텃세에 대한 귀농·귀촌인과 마을주민 간의 입장 차이는 뚜렷하다. 원주민들은 “외지에서 들어오는 이들이 시골마을에 녹아들려는 자세가 부족하다”고 지적한다. 군 단위 지방자치단체도 “농촌의 경우 혼자 생활하기 힘든 공동체적 삶의 공간인 만큼 귀농·귀촌인이 먼저 지역주민들과의 유대관계 형성에 노력해야 갈등을 줄일 수 있다”고 말한다.
반면 귀농·귀촌인들은 “요즘 시골 인심은 온데간데없고 외지인들에게 횡포를 부리거나 돈이나 우려먹는 ‘봉’ 취급을 한다”고 꼬집는다. 심지어 귀농·귀촌한 지 10년이 넘은 이들조차 “씨족공동체 같은 시골마을에서는 결국 일이 생기면 팔이 안으로 굽는다. 밖에서 들어온 이들은 영원한 외지인이자 아웃사이더일 뿐이다”라고 항변한다.
2009년 시작된 제2차 귀농·귀촌 붐은 1997년 말 촉발된 외환위기 당시 생계형 귀농과는 질적으로 큰 차이가 있다. 외환위기 당시에는 시골에 녹아들기 위해 ‘촌사람’이 되고자 했지만 지금은 귀농이라 할지라도 단순 생계형이 아닌 대안적 삶의 가치를 추구한다.
요즘 귀농·귀촌인들은 도시에서의 자신의 전문성과 인적·물적 네트워크, 도시문화의 특성을 간직한 채 이를 농촌에 접목해 ‘도시형 농촌’ ‘도시형 농업’으로 변화시켜 나가는 주체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이는 농업·농촌의 6차 산업화(1차·2차·3차 산업의 융·복합)와도 일맥상통한다.
이런 흐름 속에서 농촌 구성원 간 갈등도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외지인과 원주민 간 갈등뿐만 아니라 원주민과 원주민 간, 외지인과 외지인 간 갈등도 표출되고 있는 것. 실제로 원주민이 대다수인 전통마을에서는 마을 일을 놓고 빚어지는 신·구세대 간 불협화음이 종종 목격된다. 시골로 귀농·귀촌한 이들 간에도 이해관계가 엇갈려 서로 편을 나눠 반목하는 일이 드물지 않다.
원주민과 외지인 간 갈등 관계에서도 종전 상황이 역전되는 사례까지 나타나고 있다. 서울과 접한 경기는 물론이고 강원과 충청권에서도 마을주민 중 외지인 비율이 절반을 넘어서는 곳이 늘어나는 추세다. 이 마을들에선 외지인이 이장을 맡아 마을을 이끌면서 되레 원주민이 따돌림을 당하는 ‘역차별’ 논란까지 제기되는 실정이다.
한 귀농·귀촌 전문가는 “50대 베이비부머(1955∼1963년생 721만 명)를 중심으로 한 도시인들은 농촌으로 계속 유입되는 반면에 젊은 원주민들은 여전히 도시로 빠져나가고 있다”며 “향후 농촌에서 외지인 수가 더욱 늘어나고, 이들이 농촌의 변혁을 주도하는 과정에서 구성원 간 다양한 형태의 갈등이 더욱 증폭될 것 같다”고 우려한다.
정부와 지자체는 이런 다양한 형태의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 좀 더 효과적인 대책마련을 서둘러야 한다. 아울러 원주민이든, 외지인이든 더불어 사는 인식 전환이 절실하다. 미래의 농촌은 구성원들이 서로의 다양성을 인정하고 서로의 장점을 존중하는 동반자적 관계에서 상생하는 공동체를 만들어가는 모습이 돼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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