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일 시민단체 ‘사교육 걱정 없는 세상’이 사교육이 심한 지역의 학원들을 조사한 결과를 발표했다. 13개 중대형 학원의 수학 교습 현황을 보니 평균 4.2년 선행교육이 이뤄지고 있다고 했다. 9월부터 선행학습금지법(공교육정상화 촉진 및 선행교육 규제에 관한 특별법)이 시행되지만 학교뿐만 아니라 학원의 선행교육까지 막지 않으면 실효성이 없다고 지적했다.
조사 과정과 취지에는 박수를 보내나 부작용이 우려됐다. 해당 학원들의 실명과 선행 속도를 그대로 공개했기 때문이다. 그중 진도가 특히 빠른 한 학원에 며칠 전 전화를 걸어봤다. 아니나 다를까, 우려는 현실이 됐다. 여름방학 특별반이 평소보다 빨리 마감돼 대기조차도 어렵다는 답이 돌아왔다. 선행학습 조사 결과가 광고 효과를 낸 셈이다.
선행학습금지법은 학원의 선행교육 자체는 막지 않지만 이를 선전·광고하는 것을 금지한다. 이 때문에 이번 조사 결과는 어쩌면 ‘마지막 선행 광고’가 될지 모른다.
20∼30년 전에도 선행 사교육이 없었던 건 아니다. 다만 상위권 위주로, 영어나 수학만, 한두 학기 선행을 하는 수준이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성적 불문, 과목 불문, 기간 불문하고 선행학습은 필수처럼 돼버렸다. 대여섯 살이면 한글과 알파벳을 떼어야 대접을 받는 게 요즘 아이들의 숙명이다.
어쩌다 다들 선행 경쟁에 뛰어들게 됐을까? 과연 선행학습과 성적이 비례하긴 하는 걸까? 경륜이 쌓인 교사나 학원 관계자를 만나면 꼭 물어본다. 특히 사교육 업계에서 스타 강사나 진학지도 전문가로 이름을 날리는 이들에게는 꼬치꼬치 캐묻곤 한다. “정말 선행학습 많이 한 애들이 대학 잘 가나요?”라고.
몇 년 동안 축적한 답을 종합하면 결과는 ‘아니올시다’ 쪽으로 기운다. 공부에 재능이 뛰어난 아이라면 선행으로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지만, 대다수 아이는 제 학년 진도를 완전히 이해하는 게 훨씬 중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하지만 학부모들에게 이런 말은 들리지 않는다. 주위를 둘러보면 다들 선행을 하고 있으니 뒤처질 수 없는 탓이다. 그나마 아이가 어릴 때는 ‘나는 선행학습 따위는 안 시키겠어’라고 다짐하던 부모도 아이가 초등학교에 들어가면 “○○만 한글을 몰라서 수업에 방해가 되네요” 혹은 “△△만 영어를 전혀 못해서 본인이 스트레스를 받는 것 같아요”라는 말을 듣고 화들짝 놀라 학원으로 뛰어가기 마련이다.
한 유명 학원장은 이런 현실을 ‘개판 공연장’이라고 부른다. 모두 앉아서 공연을 보다가 누군가 자기만 좀 더 잘 보겠다고 일어서면 뒷자리 관객들이 줄줄이 일어난다. 어느새 모두 일어나면 전보다 더 잘 보이는 것도 아닌데 괜히 다리만 아픈 바보 같은 형국이 된다.
10대, 20대 시절에야 서너 시간씩 서서 뛰고 구르는 스탠딩 콘서트가 마냥 즐거웠다. 그런데 나이가 들수록 왜 어르신들이 느긋이 앉아 디너쇼를 즐기는지 이해가 간다.
현재 사교육의 손길이 미치는 자녀를 둔 부모들이라면 우리가 스탠딩 콘서트를 감당할 수 있는 세대가 아님을 고민해야 한다. 부모 세대에 비해 천정부지로 오른 집값과 생활물가를 감당하면서 선행학습 비용까지 쏟아 붓기엔 위태롭다. 퇴직 이후 자녀에게 부담을 주지 않고 기나긴 노후를 보내려면 차분히 앉아서 체력을 비축해야 할 세대다.
문제는 개판 공연장에서 누가 먼저 앉을 것인가이다. ‘모두 앉기 법’을 만든다 한들 내 자식만 공연을 못 볼까 하는 두려움이 있는 한 누군가는 몰래, 누군가는 처벌을 감수하고, 누군가는 법을 욕하며 서 있을 것이다. 보다 많은 이들이 함께 앉고자 하는 결단과 연대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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