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를 보세요. 3조 원 넘게 쏟아부어 우리은행 인수하면 뭐합니까. 수익성이 바닥까지 떨어진 데다 CEO 하나 마음대로 앉히지 못할 게 뻔한데…. 우린 안 합니다.” 우리은행에 새 주인을 찾아주겠다며 신제윤 금융위원장이 최근 내놓은 우리은행 매각방안과 관련해 인수 후보 중 하나인 금융회사 고위 관계자가 한 말이다.
그의 얘기를 이해하려면 몇 달째 KB와 금융당국을 둘러싸고 벌어지고 있는 일을 들여다봐야 한다. 각각 12일, 19일에 취임 1년을 맞은 임영록 KB금융지주 회장과 이건호 국민은행장은 요즘 심기가 영 불편하다. 각종 금융사고와 집안싸움으로 금융감독원에서 중징계 사전통보를 받아 자칫 물러나야 할 수도 있는 위기를 맞고 있기 때문이다.
연초부터 터진 카드 개인정보 유출 사태, 도쿄지점의 불법대출 사건 등으로 뒤숭숭하던 4월, KB금융 안에서 집안싸움에 시동을 건 것은 이 행장 쪽이었다. 2년 가까이 진행돼온 주(主)전산기 교체작업과 관련해 은행 이사회가 기존 IBM 메인프레임에서 유닉스 운영체제로 바꾸기로 결정하자 정병기 상임감사위원이 반대의견을 냈고 이 행장이 그의 손을 들어주면서 일이 시작됐다.
시스템 변경 반대안건을 놓고 지주회사가 선임한 이사들이 한쪽, 정 감사위원과 이 행장이 다른 쪽에서 표 대결을 벌였다. 결과는 8 대 2, 교체 쪽이 많았다. 하지만 정 감사위원과 이 행장은 결정에 불복해 금감원에 특별검사를 요청했다. 낡은 에어컨을 바꾸면서 가장이 “전에 쓰던 브랜드가 마음에 안 든다. 딴 브랜드로 바꾸자”고 결정하자 아들이 “아버지가 마음대로 에어컨 브랜드를 바꾸려 한다”며 경찰에 신고한 형국이다. 정보기술(IT) 업계발로 “전산기 교체와 관련해 리베이트가 오갔다”는 의혹도 제기됐다.
금감원이 양측 계좌를 뒤진 결과 리베이트는 사실이 아닌 것으로 확인됐다. 금융당국은 이쯤에서 빠지는 게 정상이었다. 하지만 그러지 않고 평지풍파를 일으켰다는 이유로 임 회장과 이 행장 모두 중징계 대상에 올렸다. 선생님이 싸움박질한 학생 둘을 세워놓고 불문곡직 뺨부터 때린 격이었다. 각종 금융사고의 책임이 당국에 돌아올까 봐 전전긍긍하던 상황이 영향을 미쳤다는 해석이 나왔다.
결국 임 회장과 이 행장은 ‘금융계 임직원 200명 동시징계’라는 사상 초유 징계 쇼의 주연이 됐다. 임 회장은 “정상적 회사 업무과정에서 발생한 일”이라고 해명한다. 이 행장은 “문제가 있다고 신고한 쪽을 징계하는 게 말이 되냐”고 반발하고 있다.
금융권의 관전자들은 이 다툼을 ‘정치게임’으로 본다. 관료 출신인 임 회장은 이명박 정부 때 ‘금융 4대 천왕’ 중 하나인 어윤대 KB금융지주 회장이 지주회사 사장으로 영입했다. 지난해에는 자력으로 이사회 표결을 거쳐 회장이 됐다. 현 정부가 챙겨줄 이유가 없는 인물이란 뜻이다. 반면 이 행장은 현 정부의 고위층 집안과 오랜 친분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최수현 금감원장은 국회 전문위원으로 파견 갔을 때 요즘 최고 실세로 떠오른 최경환 경제부총리와 친분을 맺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 금융권에는 “누가 진정한 강자인지 징계 결과를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란 얘기가 쫙 퍼져 있다.
이게 지난 몇 달간 KB 안팎에서 벌어진 일이다. 기진맥진한 한국 경제를 살릴 혈맥 역할을 해야 할 금융회사가 정치, 권력에 얽혀 생사를 염려해야 할 정글이 돼 가고 있다. 그 금융권 관계자의 말에 공감이 많이 간다. 누가 우리은행을 사겠다면 극력 뜯어말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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