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일 전남 순천시에서 유병언 전 세모그룹 회장이 숨진 채 발견되자, 뜬금없이 언론사 패션 담당 기자들이 바빠졌습니다. 유 전 회장 시신과 함께 발견된 점퍼와 신발 때문입니다. 경찰은 이날 “유 전 회장이 고가의 점퍼 ‘로로피아나’를 입고 고가의 운동화인 ‘와시바’를 신고 있었다”고 발표했는데, 이 브랜드들에 대해 자세히 알아봐야 했던 겁니다.
‘로로피아나’를 찾기는 그렇게 어렵지 않았습니다. 패션 담당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들어본 이탈리아의 유명 브랜드니까요. 문제는 신발이었습니다. ‘와시바’라는 브랜드는 유령 같았습니다. 인터넷을 검색해도, 주요 패션업체와 백화점 관계자들에게 물어봐도 “모르겠다”는 거였습니다.
인터넷 자료 검색의 달인들이라 할 수 있는 ‘네티즌(누리꾼) 수사대’도 별 수 없었습니다. 주요 포털사이트에 ‘와시바’라고 검색하면 나오는 내용이라곤 비슷한 발음의 욕설 ‘와 ××’뿐이었습니다. ‘패션 피플’들이 모인다는 인터넷 카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나름대로 패션 전문가라고 자처하고 있었는데, 경찰도 아는 브랜드를 우리가 모른다니 믿을 수가 없다는 반응들이었죠.
몇몇 누리꾼과 기자는 ‘와시바’가 독일 스포츠업체인 아디다스가 일본 디자이너 야마모토 요지(山本耀司)와 함께 만든 브랜드 ‘와시바(Washiba)’라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이 제품 가격은 300∼350달러(30만9000∼36만500원) 수준으로 고가의 명품이라고 할 수는 없는 데다 유 전 회장이 신고 있던 것과 디자인도 완전히 달랐습니다.
그러다 오후 늦게 ‘와시바’가 상표가 아닐 수 있다는 이야기가 흘러나왔습니다. 결국 경찰은 신발에 적힌 로마자 표기 ‘Waschbar’, 즉 ‘세탁 가능’이라는 뜻의 독일어 단어 ‘바슈바어’를 잘못 읽었다고 했습니다. 실체도 없는 ‘와시바’를 쫓던 누리꾼들과 기자들은 일순간 허탈함을 감출 수가 없었습니다. ‘와시바? 와ㅅㅂ’라는 글을 올리는 누리꾼들의 심정이 이해가 됐습니다.
‘와시바’ 사건을 그냥 해프닝으로 치부할 순 없을 것 같습니다. 이미 포털사이트의 검색창에 ‘와’라는 글자만 입력해도 ‘와시바’가 완성 검색어로 뜨고, ‘와시바’를 검색하면 ‘와시바 운동화’ ‘명품 와시바’가 연관 검색어로 뜹니다. 지나친 속보 경쟁을 벌이다 사실 확인도 제대로 거치지 않은 인터넷 언론매체들도 성급했다는 비난을 피할 순 없었습니다. ‘유병언 명품 신발 와시바와 함께 발견’ ‘유병언 착용한 와시바 신발 가격은? 헉’ 같은 기사가 쏟아졌으니까요.
존재하지도 않는 브랜드를 만들어낸 경찰은 망신살이 뻗쳤습니다. 구글에서 번역기만 한번 써 봐도 금세 알 수 있는 ‘바슈바어(Waschbar)’를 고급 브랜드로 둔갑시켰으니까요. 안 그래도 유 전 회장의 죽음과 관련한 여러 의문점이 꼬리를 물고 있는 상황에서, 경찰의 안일한 발표는 누리꾼들의 불신만 증폭시켰습니다.
재독 철학자인 한병철 독일 베를린예술대 교수는 최근 펴낸 책 ‘투명사회’를 통해 투명성에 대한 욕구는 불신에서 시작됐다고 지적했습니다. 언론과 정부에 쏟아지는 투명한 정보 공개와 진상 규명 요구는 이들에 대한 국민적 불신이 어느 정도인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와중에 경찰은 유 전 회장은 시신 사진이 유출된 것과 관련해 최초 유포자를 추적하고 있다고 밝혔습니다. 유포자 추적도 중요하지만, 국민들이 왜 경찰의 정보가 이토록 ‘투명해지기’를 바라는지부터 고민해야 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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