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룸/손택균]이 또한 지나가려나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8월 12일 03시 00분


손택균문화부 기자
손택균
문화부 기자
팍. 팍. 팍.

학생 수십 명을 일렬로 세운 영어교사가 손바닥 라이트훅을 시계추마냥 반복하며 일일이 따귀를 후려쳤다. 그러고는 살짝 거칠어진 숨을 고르며 “전부 눈 감아”라고 말했다. 찌익, 종이 뜯는 소리. 이어서 희미하게, 부스럭부스럭.

궁금함에 실눈을 떴다. 교사는 연습장을 찢어 손에 묻은 피를 닦고 있었다. 20여 년 전 서울 어느 고등학교 교실의 기억이다. 그날 그 일은 그곳 학생들에게 사건 아닌 일상이었다. 수업 중 갑자기 “운동장으로 뛰어나가 엎드려뻗쳐”라고 소리친 음악교사는 잠시 후 부러진 탁상다리를 둘러메고 걸어왔다. 수학교사에게 말대답한 급우는 대걸레자루로 두들겨 맞다가 병원으로 옮겨져 터진 머리를 꿰맸다.

10년 전쯤 한 동창과 소주잔을 주고받다 떠올린 뒤 구겨 눌러둔 기억이다. 학교는 졸업 후 찾아가본 일이 거의 없다. 가끔 근처를 지날 때도 그쪽으로 눈길을 주지 않는다. 요즘 군대 관련 뉴스를 보면서, 군 복무 시절만큼 학교에서 겪은 일이 많이 떠올랐다.

‘삼국지’의 동탁을 비롯해 역사 속 허다한 위정자가 ‘공포’를 요긴한 정치도구로 썼다. 고문, 연좌와 멸족, 공개처형, 효수는 모두 ‘대들면 고통스럽게 죽는다’는 메시지를 각인시키는 수단이었다.

일렬종대 따귀, 탁상다리 엉덩이찜질, 대걸레자루 난타는 죄다 학기 초의 일이었다. ‘교사 눈 똑바로 쳐다보면서 말대꾸하지 마라’ ‘떠들지 마라’ ‘숙제 빼먹지 마라’ 12년간 만난 교사 수십 명 중 태반이 훈계의 메시지를 말 아닌 몸을 통해 전했다.

육군 28사단 이 병장은 왜 얻어맞아 실신한 윤 일병을 비타민주사로 깨워가며 때렸을까. 해병 1사단 신병은 왜 소변기를 혀로 핥아야 했을까. 20년 전 교사의 라이트훅이 10여 회를 넘겼을 때, 교실 어느 구석에도 이미 메시지 따위는 없었다. 폭력은 언제나 스스로 폭주한다.

고등학교만 졸업하면 따귀와 대걸레자루에서 벗어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졸업을 하건 제대를 하건 여전히 가까운 건 주먹이다. 법은 멀리나마 있는지 없는지 알 수가 없다. 후임을 집단폭행해 절명시킨 이 병장, 소변기를 핥도록 지시한 선임병은 군대 밖에도 득실댄다. 강자로부터 받은 스트레스를 약자에게 푸는 버릇이 있다면, 그러면서 ‘다들 비슷하게 사는데 내게 무슨 잘못이 있느냐’고 생각한다면, 그는 틀림없이 누군가의 이 병장이다.

‘시간이 모든 것을 해결해 준다’는 말을 믿지 않는다. 시간은 무엇 하나 해결하지 못한다. 닳아 없애 잊게 할 뿐이다. 지금 이 땅에서 그걸 ‘해결’이라 부르는 이는, 시간이 모두 해결해주리라 간절히 되뇌는 이는, 어떤 사람일까.

아프게 헤집어 가능한 한 낱낱이 드러내야 한다. 어느새 ‘일부의 문제로 전체를 매도해선 안 된다’는 익숙한 변명이 슬며시 고개를 들이밀 눈치다. 이러구러 이 또한 지나가려나. 그렇다면 여기가 무간지옥이다.

손택균 문화부 기자 soh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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