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화성 전문기자의 음식강산]조계산 보리밥집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8월 13일 03시 00분


아침저녁으로 바람이 고슬고슬하다. 선득선득 살갗이 싱그럽다. 찌르르! 찌르∼ 여치가 길섶에서 가늘게 운다. 귀뚤! 귀뚜르르∼ 수컷 귀뚜라미가 애절하게 암컷을 부른다. 푸른 달빛싸라기가 강변 코스모스 꽃길에 그릇을 부시듯 와랑와랑 쏟아진다. 아, 가을인가. 앞산 너머 지리산가리산 애처롭게 울던 목쉰 뻐꾸기도 잠잠해졌다. 그 수컷 뻐꾹새는 제짝을 찾았을까.

치이∼치글치글∼ 마당가 무쇠솥 보리밥 익는 소리가 요란하다. 큼큼! 솥뚜껑이 들썩들썩 콧방귀를 뀔 때마다, 구수한 보리밥 냄새가 들크무레하다. 마루 밑에서 졸고 있던 누렁이가 코를 벌름벌름 슬슬 맴돌기 시작한다. 장독대 꽃밭엔 붓꽃 과꽃 채송화 봉숭아 백일홍 등 앉은뱅이꽃들이 배시시 웃고 있다. 닭벼슬 맨드라미꽃이 유난히 붉다. 꼬끼오! 수탉이 우렁차게 한낮 트럼펫을 불어제친다.

그렇다. 팔월의 보리밥이다. 보리는 생명의 기운이 철철 넘친다. 벼는 익으면 고개를 숙이지만, 보리는 노릇노릇 익어도 기세가 등등하다. 하늘을 향해 꼿꼿하다. 대구토박이 상희구시인(72)의 노래가 가슴을 친다.

‘모락모락 짐이 나는 방금 해내/따신 보리밥이 한 양푸이/허슬허슬한 보리밥을/누리끼리한 놋숙깔에다가/북태산겉치 퍼담고는/온통 군둥네가 등청(登廳)을 하는/질쭉한 묵은 짐장뱁추짐치 한 잎사구를/두 손으로 부욱 찢어서/똥구락키 따배이로 틀어/보리밥 우에다가 얹고는/뽈때기가 오볼티이겉치/미어터지두룩 아죽아죽 씹는데’(‘두 손으로 부욱 찢어서 묵는 짐장뱁추짐치 잎사구 맛’에서)

순천 조계산 보리밥집(061-754-3756)은 왜 하필 산중에 있을까. 왜 선암사와 송광사의 산길 중간에 꼭꼭 숨어 애를 태울까. 조계산을 동서(東西)로 가로지르는 산자락 숲길. 선암사 절마당에서 2.3km(2코스 기준), 송광사 대웅전에서 3.5km 거리. 선암사 굴목이재와 송광사 굴목이재 사이에 옴팡하게 우묵배미처럼 들어앉았다. 느릿느릿 왕복 4시간쯤 다리품을 팔아야 한다.

선암사∼송광사 숲길은 골짜기를 따라 간다. 물소리 바람소리가 듣그럽다. 참나무가 울창하다. 상수리나무, 떡갈나무, 신갈나무, 굴참나무, 갈참나무, 졸참나무…. 길바닥에 댕강댕강 잘린 참나무 가지가 점점이 널브러져 있다. 도토리가위벌레 짓이다. 길은 오를수록 너덜겅. 그 너머가 바로 보리밥집이다. 짠! 홀연히 신기루처럼 나타난다. 식당 이마에 옛날에 없었던 ‘원조’가 붙어있다. 위치도 옮겨 새로 단장했다. 위, 아래쪽에 새 보리밥집이 생긴 탓이다.

꿀컥! 꿀컥! 우선 평상에 퍼질러 앉아 막걸리부터 들이켠다. 타는 목마름에 감로수요, 마른논에 콸콸 지하수다. 부추무침, 시래깃국, 콩나물무침, 애호박조림, 무생채, 상추, 숙주나물, 열무김치, 돌나물, 무생채, 멸치마늘쫑무침, 참나물, 고사리나물, 더덕무침, 겉절이…. 이것들을 양푼보리밥에 조금씩 섞고, 참기름 몇 방울 떨어뜨린 뒤, 고추장 넣어 쓱! 쓱! 비빈다. 햐아, 꿀맛이다. 입에 쩍쩍 달라붙는다. 착착 감긴다. 보리밥 알갱이가 입속에서 고무공처럼 논다. 말랑말랑 찰지고, 탱글탱글 혀끝에 걸린다. 은근슬쩍 잇몸 사이에서 숨바꼭질하며 노는 놈도 있다.

팔만대장경 5200만 자를 한 글자로 줄이면 딱 ‘공(空)’ 한 글자만 남는다던가. 산다는 것도 결국은 ‘밥’으로 귀결된다. 사랑이고 뭐고 간에 종당엔 사람 밥통에서 나온다. 햇살이 발바닥 빛깔로 까무룩 익어 가는 퇴근길. 가슴이 보리모개처럼 꺼끌꺼끌 할 때가 있다.

슬그머니 서울 삼청동 고향보리밥(02-720-9715)을 찾는다. 놋그릇에 꽁보리밥 한 그릇 비벼 먹으면 온갖 시름이 스르르 사라진다. 노란 기장밥을 섞어 열무김치 넣고, 고추장 된장 쫌맞게 넣어 썩썩 비비다보면 한 세상 사는 게 우습구나야. 내친김에 보리숭늉까지 한 사발 걸쭉하게 들이켜면, 어럽쇼∼ 꺼∼억 꺽 보리트림이 봄날 벚꽃 벙글 듯 터진다.

찬물에 꽁보리밥을 말아 꾸역꾸역 입에 밀어넣는 맛도 일품이다. 어쩌면 이순신 장군이 울돌목 전장에서 아들과 마주앉아 먹었던 밥이 바로 ‘찬물에 만 꽁보리밥’이었는지도 모른다. 처음엔 입천장에 오돌토돌 살짝 거북스럽다가, 씹으면 씹을수록 달착지근한 맛이 새록새록 우러나온다. 너부데데한 보리밥 알갱이가 너글너글 곁을 내준다. 오호, 보리밥관세음보살!

‘꽁보리밥/물에 말아 풋고추에 된장 찍어/썩썩/한 그릇 해치우면/세상 무서울 것 없던 시대.//아아/추억은 세월을 삼키고/꽁보리밥은/나를 이렇게 키웠구나.’(윤용기의 ‘꽁보리밥’에서)

김화성 전문기자 mar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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