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오명철]교황이 한국 땅에 세 번이나 온 까닭은?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8월 19일 03시 00분


세계사의 흐름을 바꾼 '슈퍼스타' 요한 바오로 2세와 가장 낮은 곳으로 임한 '빈자의 성인' 프란치스코!



<편집자 주>

오명철 전 동아일보 논설위원
오명철 전 동아일보 논설위원
필자는 30년 가까이 동아일보 기자로 일하다 지난 해 8월말로 정년퇴임했다. 정치 사회 문화부기자를 거쳐 문화부장, 편집국 부국장, 논설위원을 지냈다. 세 번의 교황 방한을 취재 보도했다.

14일 프란시스코 교황께서 서울공항에 도착해 트랩을 내려오는 장면을 TV로 지켜보면서 주책없이 눈가에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이렇게 말도 많고 탈도 많은 분단과 갈등의 나라에 '겸손과 평화'의 선한 목자인 그 분이 직접 찾아와 주신 것이 너무나 고맙고 감사했기 때문이다. 나는 45년간 기독교 신앙을 갖고 있는 장로교 신자다.

종교계 “교황 방한땐 신자 100만명 증가”

너무나 복되게도 나는, 제 264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1984년 5월 내한해 집전한 '한국천주교 200주년 기념대회 및 순교복자 103위 시복 시성식'과 1989년 10월 제 44차 세계성체대회를 현장 취재하는 영광을 누린 바 있다. 30년 기자 생활 중 가장 감동적인 순간이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바오로 2세 교황의 두 번에 걸친 방한과 이번 266대 프란치스코 교황의 첫 방한 등 세 차례에 걸친 교황의 방한은 한국 가톨릭의 영광을 넘어 모든 한국인의 경사요 축제였다. 이를 시기 질시하는 것은 바보 같은 짓이요, 그런 인물을 배출하지 못한 집단의 콤플렉스에 다름 아니다.
종교계에서는 "교황이 한 번 다녀가실 때 마다 한국 천주교 교세가 100만 명 씩 늘어났을 것"이라고 추산한다. 실제로 교황이 첫 내한한 1984년 한국의 천주교인은 170만 명 정도였으나 현재 500만 명으로 늘어났다. 바오로 2세는 아웅산 테러로 숨진 유족을 위로했고, 프란치스코 교황은 세월호 유가족들을 끌어안았다.

1984년 내한 당시 바오로 2세 교황은 광주의 비극을 딛고 집권한 제 5공화국 체제의 억압과 압제 아래에서 고통 받고 있는 한국인을 향해 '화해와 용서'를 강조했다. 교황 자신이 한 해 전 9월 1일 소련 전투기의 만행에 의해 격추된 KAL기 희생자(269명)의 영혼을 위로하는 의미로 당시 항로를 비행하며 기내에서 피격 희생자를 위한 추모미사를 드리고 위로문도 발표했다. 냉전 체제를 종식시킨 동유럽의 민주화를 가능케 한 '대변혁의 사도'였던 바오로 2세 교황은 김포공항을 통해 내리자마자 무릎을 꿇고 땅에 입맞춤을 해 한국인들을 감동하게 만들었다. 천주교 전례사에서 유일하게 선교사의 파견 없이 단순한 '지적 호기심'에서 자생적 스터디그룹을 통해 복음을 받은 이 땅과 이 겨레에 대한 최대의 경의였다. 교황은 특히 15분간 영어로 인사말을 하면서 첫머리에 유창한 한국말로 "벗이 있어 먼데서 찾아오면 이 또한 기쁨이 아닌가" 하는 논어의 한 구절을 말해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또 연설 끝부분에 다시 또렷한 한국어 발음으로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에, 그리고 한반도의 온 가족에게 평화와 우의와 사랑을 베푸시는 하느님의 축복을 빕니다. 감사 합니다"라고 덧붙여 뜨거운 박수를 받았다. 완벽한 '팬 서비스'였다. 그 분이 가는 곳 마다 우리말로 외친 "찬미예수"는 그 후 한국 가톨릭의 대표적인 구호가 됐다.

당시 풋내기 사회부 사건기자였던 나는 행사의 하이라이트인 서울 여의도 광장의 시복시성식 현장 취재를 담당했다. 100 만 명의 신도와 시민들이 참석한 이 의식은 한 마디로 장엄, 그 자체였다. 감동과 의욕에 넘친 나는 미사 도중 조금이라도 가까운 곳에서 교황님을 뵙고 싶어 한 걸음, 한 걸음 제단 쪽으로 나아갔다. 제단 바로 밑 부분에 도달했을 때 갑자기 옆구리에 차가운 금속성 물질이 느껴졌다. 권총이었다. 깜짝 놀라 옆을 보니 검은 이어폰을 꽂고 선글라스를 쓴 경호요원이었다. 내가 받은 비표로는 단상 근처에 접근할 수 없는데 의욕이 넘쳐 최고 등급의 경호지역에 들어가 체포된 것이다. 아무런 저항도 할 수 없고,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었다. 차에 실려 영등포 경찰서로 옮겨진 나는 신분증을 빼앗긴 채 한 시간여 동안 연금돼 있다가 신문사의 신원보장으로 가까스로 풀려났다. 아! 기자 초년시절의 그 담대함과 호기심은 이제 내 안에서 다시 찾을 길이 없다.

당시 한국 천주교인들 사이에는 '교황님이 주재하시는 미사에 참석해 딱 한 가지 소원을 간구하면 반드시 소원이 이뤄진다'는 얘기가 돌았다. 나는 교황이 다녀가신 다음 해 그 '기적의 실체'를 만났다. 1980년에 강제해직됐던 한 사회부 선배가 교황이 집전한 여의도 시성식에서 "하느님! 저 동아일보에서 다시 일하게 해 주십시오"라고 기도했는데 얼마 뒤 정부의 완화조치로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던 복직을 하게 됐다고 고백한 것이다.

근접수행 故 김수환 추기경 담배끊어

평소 담배를 많이 피우시던 고 김수환 추기경께서 교황의 방한을 앞두고 '내가 교황님을 근접 수행해 다닐 텐데 입에서 담배 냄새가 나면 되겠느냐'는 생각에 '단호하게' 담배를 끊은 것은 잘 안 알려진 비화다. 추기경을 모시는 사람들이 금단 현상을 우려해 "집무실과 침실의 담배와 라이터를 치울까요?"라고 물었으나 "내가 그런 의지도 없으면 어떻게 추기경이라고 할 수 있겠느냐"고 사양하셨다고 한다. 이후 일절 담배를 입에 대지 않으셨다고 한다. 추기경님 생전에 그 분으로부터 직접 들은 이야기다. 예나 지금이나 나는 김수환 추기경님이 정말 대단한 분이라고 생각한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5년 뒤인 1989년 10월 제 44차 세계성체대회 집전을 위해 두 번째로 내한, 순교성인의 나라인 한국과 한국인에 대한 변함없는 애정을 보였다. 이 때 나는 문화부 종교담당 기자로 교황님의 모든 일정을 동행 취재했다. 가까이에서 본 그 분은 한 마디로 세계사의 흐름을 바꾸고, 공산주의의 종말을 가져온 '슈퍼스타'였다.

이번에 내한한 제 266대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취임 때부터 그 순수함과 소박함에 매료됐다. 교황 선출 자체가 하느님의 역사일 뿐더러 선출과정 또한 드라마틱하다. 대부분의 언론이 그 분의 선출을 의외로 받아들였지만 내가 귀동냥한 바로는 전임자인 제 265대 베네딕토 16세 교황님 선출 당시에도 첫 번째 투표에서 두 번째로 많은 표를 얻었다고 한다. 당시 아르헨티나 호르헤 마리오 베르골리오 추기경 신분이었던 교황은 "나에게 표를 주지 말라"는 선거운동을 열심히 하고 다닌 '못 말리는' 분이다. 또 더할 나위 없이 검소하고 자비로우면서도 마피아의 본거지에서 "너희들은 파문됐다"고 외칠 만큼 담대한 분이다. 4조 6000억 원에 이르는 바티칸 비밀금고의 빗장을 71년 만에 열어젖힌 분이기도 하다. 사람 좋아 보이는 이 천진난만한 남미 할아버지한테 도대체 어디서 그런 깡다구(?)가 나오는지 모르겠다. 그 분이 제시한 '행복해지는 열 가지 방법' 중에 나는 특히 첫 번째와 아홉 번째를 참 좋아한다. 첫째는 'Live And Let Live' (인생은 다들 자기 방식대로 사는 것이다), 아홉 번째는 '자신의 신념과 종교를 남에게 강요하지 말라'는 것이다. 나는 이 단순한 진리의 열혈 지지자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이번 한국 방문 핵심 메시지는 '소통과 화해'다. 남 북, 동 서, 이념, 세대, 계층별로 각기 제 목소리만 드높이고, '세월호' 참사와 젊은 군인들의 어처구니없는 죽음을 놓고 많은 한국인들이 분노, 좌절, 체념하고 있는 현실에서 많은 이들이 그 분의 말 한 마디, 행동 하나 하나에 큰 위안과 위로를 받고 있다. 한국인들이 격식을 따지지 않고 낮은 곳으로 임하는 프란치스코 교황과, 오직 호국(護國)과 백성만을 생각하는 영화 '명량'의 주인공 이순신 장군에 열광하고 있는 것은 역설적으로 우리가 그런 지도자를 얼마나 목마르게 기다려 왔는가를 단적으로 드러낸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을 가까이에서 뵙고 싶은 생각을 떨칠 수 없지만 성당에 다니지 않는데다 지난 해 신문사를 그만 둔 '전직 언론인'에 불과해 광화문 시복식에는 참석할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고민 끝에 평소 교분이 있는 수녀님을 통해 교황님의 꽃동네 방문에 참석하는 길을 텄다. 신원 조회를 통과했다는 연락이 왔다. 뛸 듯이 기뻤다. 나는 전생에 나라는 아니라도 가문 정도는 구했나 보다. 교황님을 세 번이나 친견(親見) 할 수 있다니! 교황님이 도착하기 직전에는 한국 천주교 전래 과정과 수난사를 공부하기 위해 신문로 서울역사박물관에서 열린 '서소문-동서문 별곡' 특별전을 둘러봤다. 자신의 신앙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내던진 순교자들과, 동방의 작고 완고한 나라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이국 땅에 와 처형된 외국인 성직자들의 생애와 발자취에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이토록 시의적절하고 공들인 전시는 드물다. 프란치스코 교황님도 전시를 보고 가셨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낮은 곳’ 임하는 그분에 국민들 열광

프란치스코 교황이 16일 서울시청부터 시복식 제단이 설치된 광화문까지 카퍼레이드를 벌이며 신자와 시민들에게 손을 흔들고 있다.(위쪽 사진) 1984년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서울 여의도광장에서 가톨릭 신자 100만명이모인가운데한국천주교 200주년 기념 미사를 집전했다. 사진공동취재단
프란치스코 교황이 16일 서울시청부터 시복식 제단이 설치된 광화문까지 카퍼레이드를 벌이며 신자와 시민들에게 손을 흔들고 있다.(위쪽 사진) 1984년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서울 여의도광장에서 가톨릭 신자 100만명이모인가운데한국천주교 200주년 기념 미사를 집전했다. 사진공동취재단
16일 서울 광화문에서 교황 주재로 열린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에 대한 시복식'은 꽃동네 사랑의연수원 사무실에서 TV를 통해 시청했다. 인파로 가득한 광화문과 시청 일대의 모습이 장관이었다. 바오로2세 교황님의 제단이 '장엄'했다면 프란시스코 교황님의 제단은 '소박'했다. 김수환 추기경님의 모습이 보이지 않아 잠시 섭섭한 생각이 들었다. 나는 한 때 한국의 김수환 추기경이 바티칸의 주인이 되시는 것을 꿈꾼 적이 있다. 하지만 교황님이 시복 선언에서 서툰 우리말로 "바오로 윤지충"이라며 말씀을 이어나가자 마음이 곧 풀렸다. 같은 자리에서 TV를 통해 시복식을 지켜보던 노부부는 감격에 겨워 계속 눈물을 흘리며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를 연발했다.

‘부드러운 언어’의 위대함 보여줘

이날 오후 4시 반 하늘 위에서 '그 분'이 내려오셨다. 헬기에서 내려 와 '희망의집' 옆 잔디밭에 내린 교황님은 아침 일찍부터 기다려온 신자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으며 특유의 그 환한 미소를 지으셨다. 여러 차례 국산 무개차에서 신도들과 눈을 마주치거나 머리에 손을 얹고 축성하셨다.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예수님의 모습이 바로 저렇지 않았을까? 희망의집에서 환자와 봉사자 어린이들을 일일이 축성하실 때의 모습은 그야말로 중세 아시시의 성(聖) 프란치스코 성인이 재림하신 듯 느껴졌다. 어린이들로부터 화환을 받은 교황은 "이 꽃다발을 성모님께 봉헌해도 되겠느냐"고 말하자 안팎에서 큰 박수갈채가 터져 나왔다. 환영사를 하는 청주교구 장봉훈 주교의 음성은 떨리다 못해 울음마저 배어있었다. 휠체어에 탄 뇌성마비 하지 마비자로부터 그녀가 발가락으로 정교하게 접은 종이학과 종이거북을 선물 받은 교황은 감동에 휩싸인듯 했다. 교황은 답례로 아름다운 모자이크 성화를 꽃동네에 선물했다. 교황은 준비된 큼지막하고 호화로운 새 전용의자를 마다하고 아예 앉지도 않았다. 자신을 맞는 수사 수녀들이 무릎을 꿇지도 못하게 했고, 경호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실내에 들어서면서 스스로 신발을 벗었다. '희망의연수원'에서는 손가락을 빨고 있던 한 영아에게 자신의 손가락을 살짝 넣어주며 자비롭게 웃기도 했다. 행사장에 들어가지는 못했지만 화면을 통해 이를 본 개신교 장로 한 분은 "가톨릭 정말 대박이다! 교황 한 분 잘 뽑아 가톨릭의 위상을 이처럼 드높이다니…"라며 부러워했다.

여러 날 전부터 교황님을 뵙는 자리에서 주님께 드릴 기도 제목을 하나를 고르느라 고민했다. 한 가지는 꼭 들어주시지 않는다던가.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는 "신은 한 쪽 문을 닫으면 다른 쪽 문을 열어주신다"는 대사가 있다.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에서 신앙과 사랑 사이에서 번민하는 마리아 수녀에게 원장 수녀님도 이 말을 했다. 그래서 나도 빌었다. "주님! 이제 제게 다른 문을 열어주시고, 자신 있게 그 안으로 들어가게 하옵소서"라고. 나는 이 기도가 반드시 응답되리라고 생각한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이번 방한은 엄벌, 투쟁, 척결, 끝장 같이 무시무시한 언어를 사용하지 않아도 얼마든지 사람을 감동, 설득, 순종시킬 수 있는 '부드러운 언어'의 위대함을 여지없이 보여 준 '평화의 순례'였다. 도착 직후 주한 교황청대사관 소성당에서 한 강론에서 "용서 받고 싶은 그 마음으로 상대를 용서하라"고 하신 말씀은 인류 전체가 가슴깊이 새겨야할 가르침이다. 그가 4박 5일의 방한에서 남긴 일정 중 남긴 가르침과 교훈을 나라와 사회, 이웃과 가정, 나 자신에 구현하고 실천하는 것은 이제 온전히 우리들의 몫이다.

오명철 전 동아일보 논설위원
#프란치스코 교황#방한#평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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