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상호 전문기자의 안보포커스]병영문화 혁신과 개혁, 이번이 마지막 기회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8월 20일 03시 00분


윤상호 기자
윤상호 기자
500만 가까운 관객을 동원한 영화 ‘군도: 민란의 시대’를 만든 윤종빈 감독은 9년 전 군 당국과 한 차례 홍역을 치렀다. 갓 대학을 졸업한 가난한 무명감독 시절 여기저기서 빌린 돈을 보태 2000만 원으로 찍은 첫 장편영화 때문이었다.

‘용서받지 못한 자’라는 제목의 영화는 지옥 같은 군 생활과 폭력 등 병영의 부조리를 적나라하게 묘사했다. 자신의 군 경험을 바탕으로 윤 감독은 비인격적이고 강압적인 병영 문화의 그늘에서 가해자이자 피해자로 전락해가는 젊은이들의 고뇌를 세밀하게 그려 주목을 받았다. 군의 협조로 실제 병영에서 촬영해 사실감까지 더한 영화는 부산국제영화제 수상과 칸 국제영화제 초청 등 국내외 평단의 호평도 받았다.

하지만 영화의 언론 시사 이후 국방부는 사전 협의한 내용과 다른 시나리오로 촬영됐다며 발끈했다. 윤 감독은 “영화의 본래 의도를 살리기 위해 어쩔 수 없었다”며 용서를 구했지만 국방부는 그를 위계에 의한 공무집행 방해 혐의로 고소했다. 이 사건으로 윤 감독은 호된 ‘신고식’을 치렀고 영화는 더 유명해졌다.

당시 군 당국은 병영의 ‘민낯’을 다룬 이 영화에 대해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않았다. 일각에선 군을 우롱한 신출내기 감독을 ‘시범 케이스’로 삼자는 주장이 나왔다. 병영을 모독한 감독의 의도가 불순하다며 따가운 시선을 보내는 군 관계자들도 있었다.

그러나 영화를 본 많은 현역 군필자들은 병영의 현실을 날카롭게 짚었다는 반응을 보였다. 구타와 가혹행위를 ‘필요악’으로 여기는 군내 왜곡된 인식과 관행을 돌이켜보는 계기가 됐다는 평도 많았다. 실제로 끊임없이 터지는 병영 내 사건사고는 영화 내용이 과장이 아님을 증명하고 있다. 육군 28사단 윤모 일병 폭행사망사건에서 보듯이 우리 병영의 현실은 영화보다 더 잔인하고 비극적이다.

영화보다 더 가혹하고 엽기적인 병영 악습이 대물림되는 현 사태의 가장 큰 책임은 군 지휘부에 있다고 본다. 그런 측면에서 윤 일병 사건은 고질적이고 후진적인 병영 문화를 수수방관한 군 당국과 지휘부에 경종을 울린 대참사였다. “군대 많이 좋아졌다” “지금이 어느 때인데…” 하는 지휘관들의 방심과 자만이 병영 비극을 초래한 주범이라는 얘기다.

군 일각에선 ‘왕따’ ‘학교 폭력’ 등 사회병리 현상을 군내 사건사고 원인으로 꼽기도 한다. 인성적 결함이 있는 젊은이들이 걸러지지 않은 채 군에 유입돼 ‘관심병사’가 되고, 이들이 사건사고의 불씨가 된다는 의미다. 군도 ‘피해자’라고 항변하지만 병영 내 고질적 폐습과 부조리를 간과한 무관심, 무소신, 무능력의 3무(無) 지휘관들이 사태를 악화시켰다는 비난을 피할 수 없다. 실제로 지난 수십 년간 숱한 군내 사건사고 때마다 군 수뇌부는 병영 혁신과 군대 개혁을 다짐했지만 구호에 그친 채 흐지부지됐다.

군 지휘부의 안이한 인식은 이번 사건의 사후대책에서도 드러난다. 군 통수권자에게 보고한 병영혁신안 중 ‘일반전방소초(GOP) 장병 면회 허용’ ‘구타가혹행위 신고제도(군파라치)’ 등을 빼면 과거 대책의 재탕 삼탕 수준이다. 국방 옴부즈맨과 병 계급체계 및 군 사법체계 개편 등 근본 처방으로 제시된 대안들은 군 임무를 해칠 수 있다는 이유로 쏙 빠졌다. 더욱이 군 당국은 윤 일병 사건의 보고 부실 책임을 물어 고위공무원과 장교 12명을 징계 및 경고 주의조치하고도 장관과 육군참모총장 등 군 수뇌부는 면죄부를 줘 빈축을 사고 있다.

이번 사태를 계기로 모병제를 도입하자는 주장도 나온다. 하지만 야만적이고 후진적인 병영 환경을 확 바꾸지 않는 한 공염불일 뿐이다. 지금보다 몇 배의 봉급을 준다고 한들 구타와 가혹행위가 판치는 병영에 자원할 젊은이가 얼마나 되겠는가.

결국 사태 해결의 출발점은 병영 문화의 개혁과 혁신의 실천이다. 군 수뇌부는 ‘병폭(兵暴·병영폭력)과의 전쟁’ 선포를 포함한 특단의 조치를 취하길 바란다. 군 스스로 칼을 댈 의지도, 능력도 없다면 과감히 외부의 수술칼을 받아들여야 한다. 군에 보낸 자식의 무사를 기원하는 부모들의 가슴을 짓밟는 경우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일벌백계하겠다는 군 통수권자의 경고가 빈말이 되어선 안 된다. 군 수뇌부는 이번이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하고 병영 문화를 환골탈태시켜야 한다.

윤상호 전문기자 ysh1005@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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