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인숙의 행복한 시읽기]<302>들개 신공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8월 27일 03시 00분


들개 신공
―박태일(1954∼ )

벅뜨항 산 꼭대기 눈
어제 비가 위에서는 눈으로 왔다
팔월 눈 내릴 땐 멀리 나가는 일은 삼간다
게르 판자촌 가까이 머물며 사람들
반기는 기색 없으면 금방 물러날 줄도 안다
허물어진 절집 담장 아래도 거닐고
갓 만든 어워 둘레도 돈다
혹 돌더미에서 생고기 뼈를 찾을 제면
다 씹을 때까진 떠나지 않는다
누가 보면 어워를 지키는 갸륵함이라 하리라
공동묘지를 돌면 소풍 나섰다 생각하라
울타리 아래 아이 똥 닦아 먹고
비 온 뒤 흙탕물로 목을 축이며
물끄러미 발등을 핥는다
우리는 대개 검다 속살은 붉지만
시루떡처럼 부푼 석탄광 잡석 빛깔이다
때로 양떼 가까이 갔다 집개에게 쫓겨난다
그래도 사람 가까이 머물러야 한다
야성은 숨기고 꼬리는 내려야 한다
집 없고 가족 없는 개라 말하지 마라
들개는 본디 가족을 두지 않는다
사람 가운데도 더러 개를 닮은 이가 있으나
우린 마냥 들개다 잉걸불 이빨을 밝히고
짖는다 두려워 마라 물기 위한 일이 아니다
다만 사람과 거리를 둘 따름
어금니 빠지고 벽돌을 삼킨 양 속이 무겁지만
고픈 일이 배뿐이겠는가 길가 장작더미 지날 땐
피어오를 저녁 불꽃을 떠올릴 줄도 아는
나는 들개다 그런데 사실을 밝히자면
목줄이 문제다 걷기도 힘들다
어려서 주인을 떠날 때부터 두른 목줄
풀지 못한 목줄이 몇 해 나를 졸라왔다
지나는 일족을 보며 나는 주로 앉아 지낸다
동정하지 마라 이렇듯 숨가쁜 슬픔도
들개의 신공이다.


기행시는 시적 완성도가 떨어진다는 내 편견을 깨뜨린 시집 ‘달래는 몽골 말로 바다’에서 옮겼다. ‘달래는 몽골 말로 바다/두 억 년 앞선 때는 바다였다는 고비알타이/소금 호수 천막 가게에서/달래장아찔 카스 안주로 주던/달래는 열 살/아버지 어머니/달래 융단 아래 묻은’(시 ‘달래’ 중에서). 몽골의 여기와는 완연히 다른 풍토와 생김새나 성정이 우리와 닮은 사람들이 시 한 편 한 편에 생생하게 담겨 있다. 에두르지 않으면서 담담히, 정밀하게 그린 시들을 읽으며 총천연색 영상이 흑백 영상보다 더 절묘하고 가혹하게 풍광과 사람살이의 정조를 보여줄 수도 있다는 걸 알겠다.

벅뜨항은 탄광촌이었던 곳으로 몽골에서도 한층 가난한 마을인 듯. 그런 곳에서 들개로 살아가자니 허구한 날 배를 곯을 테다. ‘고픈 일이 배뿐이겠는가.’ 개는 유전자 깊이 사람에 의탁해 살도록 길들여졌는데 아무도 그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더욱이 이 들개는 길가 장작더미만 봐도 ‘피어오를 저녁 불꽃을 떠올릴 줄 아는’, 집에 살던 개였건만 강아지 적에 버려졌다. ‘풀지 못한 목줄’은 개의 굵어진 목뿐 아니라 목줄을 해준 사람에 대한 그리움으로 가슴을 조였으리라. 이 ‘숨 가쁜 슬픔’은 시인의 신공이기도 한 듯. 모든 숨 탄 것들의 고단함과 쓸쓸함과 슬픔을 시인은 따뜻하고 웅숭깊은 품으로 그러안는다.

황인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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