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우가 해체되던 1999년 난 고등학교 2학년이었다. 기업과 경제보다는 입시 준비와 아이돌에 더 관심 많은 시절이었다. 뉴스는 어쩌다 봤는데 그때마다 대우는 늘 문제 기업으로 등장했다. 잘은 모르지만 분명 망해가는 듯했고, 뭔가 잘못한 기업 같았다. 대우의 몰락으로 하루아침에 직장을 잃은 직원들과 그 가족들의 눈물겨운 이야기가 쏟아질 때마다 혹시 친구 아빠 중에 대우 사람이 있진 않나 걱정했다.
시간이 흘러 기자가 된 뒤 재계와 기업들을 맡게 됐지만 대우는 관심 밖이었다. 이미 ‘승자의 기록’에서 삭제된 기업이었고, ‘주요 그룹’도 아니었다. 김우중 전 회장에 대한 인상도 별로였다. 대우 직원과 그 가족들의 파탄을 야기한 장본인인데 정작 본인은 18조 원에 달하는 추징금을 피해 해외에 살며 호의호식을 한다는 얘기가 파다했다.
그런 김 전 회장을 엊그제 저녁 봤다. 26일 출간된 책 ‘김우중과의 대화’를 기념해 열린 ‘대우특별포럼’ 행사장에서였다. 나는 지하주차장과 연결되는 엘리베이터 앞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김 전 회장은 이곳을 통해 행사장에 들어갈 가능성이 높았다. 예상대로 김 전 회장이 나타났다. 다른 기자들은 없었다.
질문을 던지기 전 “회장님 안녕하세요” 하고 인사를 건넸다. 그러자 김 전 회장이 눈을 마주치고 “안녕하세요” 하고 가녀린 음성으로 천천히 답했다. 그런데 그 짧은 순간, 맥이 탁 풀렸다. 그리고 마음이 짠했다.
눈앞의 김 전 회장은 대우그룹 전 회장도, 한 시대와 세계를 풍미한 경영자도 아닌 작고 병약한 ‘인간 김우중’이었다. ‘책 출간 소회는?’ ‘대우를 해체한 관료들에 대한 억울함은?’ 같은, 준비한 질문들이 적절치 않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는 양쪽에서 두 사람의 부축을 받으며 걸었고(카메라 앞에서는 혼자 걸었다), 78세의 나이지만 팔순 노인 같은 느낌을 줬다. 전 대우 직원 500여 명 앞에서 짧은 연설을 할 때 그의 목소리는 계속 떨렸다. 코를 훌쩍이기도 했다. 천하의 김우중이 울고 있었다.
나는 이달 초 책 출간 소식을 듣고 김 전 회장을 처음으로 공부했다. 검색을 하고, 옛 기사를 찾아 읽고, 책도 읽었다. 26일 출간 예정이었던 책도 미리 받아 읽었다. 몰랐던 대우의 모습이 많았다. 척박한 환경에서 단돈 500만 원에서 출발해 직원 25만 명, 매출 71조 원의 기업으로 큰 대우. 한국 전체 수출의 13%를 도맡던 대우. 끝이 어쨌든 간에 그걸 일군 건 김 전 회장이었다. 그는 대단한 사람이었다.
인간 김우중 입장에서 지난 시간은 무척이나 힘겹고 서러웠을 듯했다. 결과론적으로 ‘패자’로 끝이 났기에 좋은 얘기는 모두 묻히고 죄인이 됐으니. 하지만 그와 대우에 빛나던 날들이 있었던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어차피 판단은 사람들의 몫이지만, 그는 얘기라도 해보고, 가능하다면 이해받고 싶었던 것 아닐까.
이번 책이 나온 뒤 언론에서는 15년 전 대우 해체를 두고 김 전 회장과 전 관료들을 싸움 붙이는 듯한 모양새의 기사가 많이 나오지만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니란 생각이 든다. 인간 김우중 입장에서 이 책은 말할 수도, 들어줄 이도 없던 얘기들에 대한 기록이란 것 자체에 의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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