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인숙의 행복한 시읽기]<304>하늘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9월 1일 03시 00분


하늘
―박두진(1916∼1998)

하늘이 내게로 온다.
여릿여릿
머얼리서 온다.

하늘은, 머얼리서 오는 하늘은
호수처럼 푸르다.

호수처럼 푸른 하늘에
내가 안긴다. 온몸이 안긴다.

가슴으로, 가슴으로
스미어드는 하늘
향기로운 하늘의 호흡.

따가운 볕,
초가을 햇볕으로
목을 씻고,

나는 하늘을 마신다.
자꾸 목말라 마신다.

마시는 하늘에
내가 익는다.
능금처럼 마음이 익는다.


고개를 돌려 창밖을 본다. 늘 거기 있는 하늘, 그러나 늘 같지 않은 하늘. 오늘은 구름 한 점 보이지 않는 은회색, 막을 씌운 듯한 하늘에서 햇살이 뿌옇게 쏟아지고 있다. 시심을 불러일으키기는커녕 눈길 한 번 끌지 못할 하늘이다. 글쎄, 미술을 하는 사람이라면 조각칼을 대고 싶을 것도 같다. 저 덤덤한 질료일 뿐인 하늘의 막을 긋고 벗겨서 뭔가 근사한 형상을 탄생시킬 것도 같다. 시각예술가들은 다른 분야 예술가보다 덜 감상적이다. 그들은 저 스스로가 세계여서 창작 대상과 정을 교류할 필요를 느끼지 않고, 공격하고 굴복시키고 다스리는 것 같다. 우리네 마음 여린 시인만큼 날씨의 영향을 받지도 않으리라.

하늘은 늘 거기, 우리 머리 위에 있는데 ‘머얼리서’ 온단다. 화자는 하늘 한 번 쳐다볼 여유 없이 살았나 보다. 어느 날 문득 바라본 초가을 하늘이 어찌나 파랗고 맑은지 화자는 눈을 떼지 못한다. ‘호수처럼 푸른 하늘’에 화자는 풍덩 뛰어든다. 아, ‘가슴으로, 가슴으로/스미어드는 하늘/향기로운 하늘의 호흡’! 처음에는 ‘여릿여릿 머얼리서’ 오던 하늘이 출렁출렁 푸른 호수로 눈에 가득 차고, 코로 허파로 스며들고, 입으로 목구멍으로 배 속으로 흘러들어온다. ‘하늘을 마신다./자꾸 목말라 마신’단다. 그런 줄 모르고 살아왔지만 화자는 푸른 하늘이 고팠던 것이다. 향기롭지도 않고 메마른 도시 일상인의 갈증을 시원스레 풀어주는 청량한 하늘! 우리 가끔이라도 하늘을 보자. 사람들은 왜 하늘의 별을 보며 그리움을 느끼고, 죽으면 저 하늘로 돌아간다고 생각할까. 정말 우리는 우주 저편에서 온 것일까. 아무리 봐도 싫증나지 않는 하늘….

황인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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