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부터 고교 필수 한국사 교과서 8종 중 4종이 유관순 열사를 다루지 않고 있다. 나머지 4종 중 2종도 사진 설명 정도로 열사의 삶을 다룬다.
유관순 열사(1902∼1920)는 충남 천안군 동면 용두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일찍 기독교 감리교에 입교한 개화 인사로 재산을 털어 학교를 세워 민족교육운동에 몸 바친 계몽운동가였다. 유관순은 1918년 이화여자보통학교 고등과 1학년에 진학해 신학문을 배운다. 당시 이화학당은 이문회(以文會)라는 자치활동기구를 통해 시국 관련 토론회를 열었고 사회 저명인사들을 초청해 시국강연회도 열었다. 이런 환경에서 애국애족정신을 키우게 된 유관순은 어느 날 밤 친구들과 물감으로 태극기를 그려 학교 곳곳에 붙이기도 했다.
유관순은 1919년 서울에서 3·1만세운동이 일어나 일제가 전국 학교에 휴교령을 내리자 고향으로 내려간다. 그리고 한 달 뒤인 4월 1일 천안군 병천면 아우내장터 만세운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한다. 조인원(독립운동가 조병옥 박사 부친), 숙부 유중무 등이 세운 거사에 대해 연락하고 상의하는 연락책을 맡은 것이다. 또 사촌언니 유예와 함께 태극기 제작도 전담했다.
마침내 4월 1일 오후 1시 마을 어른들과 선두에 서서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며, 태극기를 흔들고, 일본 헌병대를 향해 나아갔다. 헌병들이 시위대에 총을 쏘려 하자 총구 앞으로 뛰어나가 ‘쏘지 마라!’ 외치며 막아서는 바람에 체포된다. 이날 헌병의 총칼에 시위대 19명이 즉사하고, 30여 명이 부상당했으며, 16명이 재판에 회부되었다. 유관순의 부모도 이때 흉탄에 맞아 즉사한다. 유관순의 집과 헛간도 불태워졌다. 이날 일본 헌병의 인적 피해는 단 한 명도 없었고, 물적 피해도 헌병 주재소 유리창이 깨지고, 벽이 파손되고 전화선이 절단되는 정도였다.
유관순은 공주법원에서 5년, 서울법원에서 3년형을 받고,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됐다. 수감된 날부터 매일 틈만 나면 ‘대한 독립 만세’를 외쳤으며, 모진 고문을 당했다. 같은 방에 수감된 산부(産婦)가 매우 허기져하자 자신의 밥을 양보했고 아기 기저귀를 자신의 몸에 돌돌 감아 체온으로 말려 주기도 했다.
유관순은 모진 고문을 견디지 못하고 출옥일을 며칠 남기지 않고 눈을 감았다.
“손톱이 빠져나가고 귀와 코가 잘리고 손과 다리가 부러져도 그 고통은 이길 수 있사오나 나라 잃은 고통만은 견딜 수 없다. 나라에 바칠 목숨이 하나밖에 없다는 것이 유일한 슬픔”이라는 것이 그가 남긴 유언이었다.
시신은 가족들이 이태원 공동묘지에 모셨으나, 일본이 이 일대를 군부대로 개발하면서 미아리 공동묘지로 이장하게 됐고 이 과정에서 유해가 유실돼 천안 매봉산 기슭에 초혼묘로 모셔지게 된다.
유관순은 당시 만세운동으로 형을 받은 사람들 중 가장 중한 벌을 받았다. 이는 그의 저항의 강도가 얼마나 컸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며 만세운동에 주도적 역할을 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유관순 집안은 부모, 오빠, 숙부 등 가족 7명이 독립장, 애국장, 애족장 등 건국 훈장을 받은 집안이다.
이런 유관순 열사의 삶이 빠진 역사 교과서를 채택한 고교가 전체의 60%다. 교육부가 주최한 토론회에서 역사에 대해 편향된 시각을 가진 사람들의 의도라고 볼 수 있는 정황이 드러났다. 대한민국은 자랑스러운 독립투사들의 피로 세워진 나라이다. 역사는 혼을 가르치는 것인데 인격과 자아정체성 형성에 매우 중요한 시기인 고교생들에게 유관순 열사를 가르치지 못하는 나라에 미래를 이끌 혼이 만들어질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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