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현 셰프의 비밀노트]<5>프렌치 양파 수프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9월 3일 03시 00분


사진 출처 레시피닷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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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현 셰프
정동현 셰프
너 때문에 많이 울었다. 징글징글하다. 그래도 난 너를 놓아줄 수 없다. 너는 나의 운명. 너는 바로, 주방의 영원한 동반자, 온 세계 주방이 공유하는 단 하나의 재료, 양파다.

양파만큼 싸고 쓰임새가 다양한 재료는 드물다. 짬뽕 짜장에만 쓰는 게 아니다. 프랑스 요리에서도 마찬가지다. 육수 끓일 때, 고기나 생선 삶을 때, 소스 만들 때, 안 쓰이는 곳이 없다. 프랑스의 일류 요리사가 혁명의 피바람을 피해 덴마크에 와서 한 독실한 자매의 하인으로 일하며 요리의 진정한 의미에 대해 말하던 영화, ‘바베트의 만찬(Babbette's Feast·1987년)’에서 바베트가 상점에 들르면 가장 먼저 고르는 재료도 바로 양파였다(이 디테일을 알아차리다니. 놀랍지 않은가?).

이 양파가 당당히 주연으로 등장한 요리가 있다. 그 이름도 유명한 프렌치 양파 수프다. 프렌치 양파 수프는 캐러멜화된 양파를 넣은 수프다. 엄청난 양의 양파를 잘게 썰어 태우듯이 짙은 고동색에 가깝게 오래 볶는다. 아무것도 넣지 않아도 그 거무죽죽한 양파에서는 캐러멜 비슷한 맛이 난다. 채소에 들어 있는 당 성분이 불을 만나 진정한 캐러멜이 되는 거다. 거기에 서양식으로 구운 뼈를 하루 종일 고아낸 진한 쇠고기 육수를 붓는다. 그리고 향을 더하기 위해 코냑이나 마데이라 같은 술을 넣는다. 그 위에 치즈가 지글거리는 크루통을 올리면 완성이다. 강장 효과가 있는 캐러멜화된 양파, 뼈를 푹 고아낸 육수, 단백질이 듬뿍 담겨 있는 치즈까지. 감칠맛 하면 손에 꼽히는 녀석들이 죄다 한자리에서 만난 것인데, 냄새만 맡아도 힘이 날 것 같다.

양파 수프를 먹은 것은 아주 오래전, 네로 황제가 난장을 치던 로마시대까지 그 역사가 거슬러 올라간다. 지금이나 그때나 양파는 흔하고 쌌다(올해는 양파 값이 더더욱 싸다. 풍년에 재배면적까지 늘어서란다. 제발 양파 좀 많이 드시라). 있는 사람도 견뎌내기 힘든 겨울, 없이 사는 사람들은 그때부터 몸을 녹이려 후끈한 양파 수프를 마셨다.

영화 속 바베트가 평소 끓이던 수프도 아마 양파수프였을 것이다. 한 푼이라도 아껴야 하는 영화 속 그녀에게, 그만큼 ‘가성비’가 좋은 음식도 드물기 때문이다. 그러다 프렌치 양파 수프는 1960년대 경제 호황기를 맞아 일어난 프랑스 요리 붐 속에 재조명을 받았다. 그 후 싸구려 요리에서 정통 프랑스 요리로 탈바꿈한 이 수프는 그 인기를 몰아 전 세계적으로 유명해졌다.

한국에서도 프렌치 양파 수프는 ‘힙’하고 ‘핫’한 음식이다. 하지만 먹어 보면 느낄 것이다. 프렌치 양파 수프는 가볍기보다는 무겁고, 우아하기보단 시골스럽다. 유래를 따져 봐도 그리 비쌀 음식이 아니다. 다만, 만드는 데 품이 많이 들어 레스토랑이 아니면 맛보기 힘들어졌을 뿐이다.

그 옛날에는 우리네 어머니가 하루 종일 곰탕을 우려내듯 그네들의 어머니들도 지친 식구들을 위해 수프를 끓였다. 식구들이 돌아올 때쯤 오래된 빵을 잘라 치즈를 올린 다음 노릇하게 굽는다. 들판 너머로 해가 지면 차가운 바람에 몸을 움츠리고 먼 길 걸어온 이가 문을 열고 들어설 것이다. 그때 주방에서 퍼져 나온 고소한 냄새를 맡을 것이다. 온 가족이 식탁에 둘러앉아 손에 손을 잡고 기도를 올린 뒤 그들은 고된 하루를 위로해주는 따뜻한 수프 한 그릇에 힘을 얻을 것이다. 그리고 오늘도, 아직 살아있음에 감사와 안도의 숨을 쉴 것이다.

영화 ‘바베트의 만찬’ 마지막, 복권 당첨금 1만 프랑을 모두 만찬을 꾸리는 재료를 사는 데 써버린 바베트를 걱정하는 두 자매에게 그녀는 이렇게 대답했다. “진정한 예술가는 결코 가난하지 않아요.”

진정으로 맛있고 소중한 요리는 예술가와 마찬가지로 화려한 외피가 필요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수천 년간 이어져온, 투박하지만 친숙한 그 따뜻한 프렌치 양파 수프처럼.

※서울대 경영학과를 졸업한 필자(32)는 영국 고든 램지 요리 학교 ‘탕트 마리’에서 유학하고 호주 멜버른 크라운호텔 등에서 요리사로 일했다.

정동현 셰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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