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305>김 기사 그놈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9월 3일 03시 00분


김 기사 그놈
―이봉환(1961∼ )

여보씨요잉 나 세동 부녀 회장인디라잉 이번 구월 열이튿날 우리 부락 부녀 회원들이 관광을 갈라고 그란디요잉 야? 야, 야, 아 그라제라잉 긍께, 긍께, 그랑께 젤 존 놈으로 날짜에 맞춰서 좀 보내주씨요잉 야? 이놈이나 저놈이나 다 좋다고라? 앗따, 그래도 우리가 볼 때는 이놈하고 저놈이 솔찬히 다르등마 그라네 야, 야, 그랑께 하는 말이지라 아니, 아니, 그놈 말고, 아따, 그때 그 머시냐 작년에 갔든… 글제라 잉 맞어 그놈, 김 기사 그놈으로 해서 쫌 보내주랑께 잉, 잉, 그놈이 영 싹싹하고 인사성도 밝고 노래도 잘 하고 어른들 비우도 잘 맞추고 글등마 낯바닥도 훤하고 말이요 아, 늙은 할망구들도 젊고 이삐고 거시기한 놈이 좋제라잉 차차차, 관광차 타고 놀러갈 것인디 안 그요? 야, 야, 그렇게 알고 이만 전화 끊으요, 잉?


이 부녀회장은 혼자 전화 통화를 하는 게 아닐 테다. 모처럼 한가롭게 다리를 뻗고 앉았거나 뒹굴뒹굴 누워서 통화 내용에 귀를 쫑긋 세우고 “글제, 글제” 추임새를 넣거나 “아따 언니, 그놈이 뭐요?” 하며 까르르 웃는 부녀회원들에게 둘러싸여 있을 테다. 마을 공터마다 콩이며 팥이며 붉은 고추를 한바닥 널어놓고 한숨 돌리는 농촌의 구월. 한 해의 징글징글한 고생을 마무리하는 관광철이다.

이 총기 있고 화통할 부녀회장은 관광여행을 준비하는 데도 만전을 기하는데, 여행사에 괜히 깐깐하게 ‘갑질’을 하지 않는다. 그저 ‘김 기사 그놈’을 확실하게 요구한다. ‘영 싹싹하고 인사성도 밝고 노래도 잘 하고 어른들 비우도 잘 맞추고’ 게다가 ‘낯바닥도 훤한’ 김 기사. 친절과 환한 표정은 직업의식이 투철한 데서도 나올 테지만, 손님들을 어머니 같고 누이같이 느끼는 마음에서 우러난 것일 테다. 이 마을 여인들은 그걸 알아주는 것이다. 돈 몇 푼 차이로 거래처를 바꾸지 않고 어지간하면 단골이 되는 질박한 손님들을 여행사 직원도 알아서 모신다. 한 해 한두 번이나 대할 손님의 말귀를 척척 알아듣고 능청스레 맞장구를 친다. 이렇게 제 할 일을 제대로 하는 사람들만 있다면 서로 마음 상할 일이 없으련만. ‘아니, 그놈 말고’ 소리를 듣는 사람은 제 직업이 적성에 맞는지 한번 돌아봐야 하리라. 기분 한번 내자고 마음먹은 순박한 이들을 ‘봉’으로 알고 바가지나 씌우며 성의 없이 대하는 관광지 식당이나 숙박업소도 반성하시길. 사투리 맛이 생생히 씹히는 재밌는 시다.

황인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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