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주택가 골목길에서 당신이 운전을 한다고 치자. 차량 2대가 나란히 가기 힘든 좁은 길이다. 이런 길에서 당신은 늘 시속 30km를 유지하는 ‘착한 운전자’다. 잠시 뒤 네 갈래 골목길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사고가 났다. 옆 골목에서 승용차 한 대가 쏜살같이 달려와 당신의 승용차 옆을 받은 것이다. 다행히 크게 다치지는 않아 명함을 주고받고 헤어졌다. 하지만 박살난 범퍼와 전조등을 쳐다볼 때마다 울화통이 치밀어 올랐다.
당신을 더 열 받게 하는 것은 보험사의 사고 처리 결과다. 보험사는 과실의 책임을 정확히 절반씩 나눴다. 각각 똑같은 너비의 길을 운전하다 동시에 교차로에 진입했다는 이유에서다. 항의해도 어쩔 수 없다. 사고가 난 길은 제한속도가 무려 시속 60km이기 때문이다. 30km로 서행한 당신이나 59km로 달린 상대방이나 책임은 ‘오십 보 백 보’인 것이다.
사고에 이르지는 않아도 운전자라면 이와 비슷한 상황을 한두 번 겪었을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 분을 삭인 채 손해를 감수한다. 경찰이 서울지역 이면도로의 제한속도를 낮추기로 한 가장 큰 목적은 바로 이런 억울한 피해를 줄이는 것이다. 이는 억울한 보행자도 마찬가지다. 보행자가 차에 치였을 때 가해 차량의 과속 여부는 과실의 크기를 정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 피해자와 가해자가 합의해도 교통사고처리특례법에 따라 과속이 확인되면 반드시 형사처벌을 받기 때문이다.
현재 서울지역의 이면도로는 전체 도로 연장(8174km)의 80.2%인 6558km에 이른다. 이 글을 읽고 어디에 있는 길인지 두리번거릴 필요가 없다. 큰 도로로 둘러싸인 대규모 아파트 단지 등을 제외하고 내 집 앞, 내 회사 뒤편의 골목길이 대부분 해당된다. 그런데 이런 중앙선도 없는 좁은 길의 제한속도가 대부분 시속 60km에 맞춰져 있다.
경찰이 편도 1차로 이하 이면도로의 제한속도를 기본적으로 시속 30km로 낮추겠다고 하자 이런저런 말이 많다. 정부는 ‘손톱 밑 가시’를 빼자며 규제 완화에 나서는데 오히려 대못을 박고 있다는 것이다. 세수가 부족해지자 경찰이 제한속도를 낮춘 뒤 단속을 강화해 범칙금을 걷어 들이려 한다는 얘기도 나온다. 이면도로의 교통 정체가 더 심해질 것이라는 불만도 적지 않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제한속도를 낮춰도 단속은 지금보다 늘어나기 쉽지 않다. 현재 서울지역에서 교통 업무에 종사하는 경찰관은 약 2100명. 이 가운데 현장 단속에 투입되는 인력은 1100여 명이다. 도심 교통난 정리하기도 바쁜 마당에 이면도로의 속도위반까지 일일이 단속하기는 현실적으로 어려운 일이다. 또 경찰은 교통량이 많은 이면도로의 경우 정체가 심해질 것에 대비해 부분적으로 제한속도를 높일 방침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 운전자의 심리적 저항감은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 같다. 그럼 이렇게 생각해 보면 어떨까. 제한속도를 낮추려는 곳은 도심 한가운데 왕복 8차로 도로나 고속도로가 아니다. 바로 내 아이가 뛰어노는 골목길이다. 그리고 이곳의 속도를 낮추는 것은 당신처럼 규정 속도를 지키는 ‘착한 운전자’를 위한 ‘착한 규제’일 뿐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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