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순방에 나선 강석주 북한 노동당 국제담당 비서가 첫 방문지인 독일에서 ‘조건 없는 6자회담 재개’를 주장했다. 그는 “(남북정상)합의서를 이행하면 (남북관계가) 다 풀린다”며 우리 측에 관계 개선의 책임을 떠넘기기까지 했다.
1994년 북-미 제네바 합의를 이끌어냈던 북한 외교 실세의 이례적 유럽 4개국 순방 외교여서 북의 태도 변화가 기대됐으나 출발부터 실망스럽다. 북한이 국제무대에서 대화와 협상을 할 것처럼 내보낸 그의 주장이 이 수준이라면, 이달 말 북한 외무상으로서는 15년 만에 유엔 총회에 참석하는 이수용에게도 변화를 점치기 힘들다는 얘기가 된다. 북한이 어제 정권 수립 66주년을 기념하며 ‘자주 통일’ 실현을 위해 남북관계를 개선해야 한다고 강조한 것도 순수하게 받아들이기 어렵다.
북한은 6자회담에서 이뤄진 핵 관련 합의를 통해 이득을 챙기고는 약속을 깨는 행태를 보였다. 한국이 대부분의 예산을 부담한 신포 경수로 사업은 2003년 중단돼 15억6200만 달러가 허공에 날아갔다. 북한은 2007년 2·13합의에서 영변 핵시설 폐쇄와 봉인을 약속했지만 한국과 미국이 보낸 70만 t이 넘는 중유만 받고 합의 이행을 중단했다. 조건 없는 6자회담 재개 주장에는 북한의 핵 보유를 인정하고 북-미 간에 핵군축 협상을 시작하자는 의도가 숨겨져 있다.
강석주의 유럽 순방 하루 전인 5일 국제원자력기구(IAEA)는 북한이 6년 만에 영변의 5MW급 흑연 원자로를 재가동한 징후를 포착했다고 밝혔다. 영변 원자로는 발전용이 아니다. 북한이 핵무기를 더 만들 의도가 아니라면 핵폭탄 제조용 플루토늄을 생산하는 원자로를 다시 돌릴 이유가 없다.
마침 우리 측 6자회담 수석대표인 황준국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이 미국 워싱턴에서 글린 데이비스 수석대표를 비롯한 미국 정부 인사들과 접촉한다. 협상을 통한 북핵 해결의 희망을 유지하려면 한미가 북한의 무조건 6자회담 재개 공세를 단호하게 거부하고 중국도 동참하도록 설득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