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이 잠든 책들이 빽빽이 꽂혀 있는 곳인지라 이곳에 들어찬 것은 침묵과 그림자들뿐이다. 잠든 책을 깨우기 위해서는 열과 행을 지나 고유번호에 얽힌 내력을 어느 정도 터득하고 있어야 한다. 단 한 번도 깨어나지 않은 책들도 꽂혀 있는 곳이라 잠든 책을 끄집어낼 때는 신중한 손길이 필요하다. 겉장을 넘기는 순간 알게 되지만 잠든 책을 잉태하고 출산한 산모의 증명사진이 박혀 있다. (때로는 박혀 있지 않을 때도 있다) 책장을 한 장 한 장 넘기다보면 갠지스 강 주위를 어슬렁거리던 벵골호랑이 한 마리가 책장을 넘기던 손가락을 핥을 때도 있고 불시착한 우주선 안에서 끄집어내 달라는 다급한 목소리가 들릴 때도 있고 책장을 넘기던 손가락을 타고 달팽이가 기어 나올 때도 있다. 그리고 가끔씩 흰 눈이 펑펑 내릴 때도 있다. 어느새 다정한 친구가 되어버린 침묵 어느새 저 멀리 구석진 자리에서 다른 그림자와 밀회를 벌이고 있는 그림자 이곳에 들어온 이유를 망각할 때도 있다. 깨어난 책을 다시 꽂아놓는 일은 아주 특별한 규칙과 행동이 요구되기에 침묵에 잘 길들여진 손길에 맡겨놓아야 한다. 깨어난 책을 다시 꽂아놓는 일은 장의사보다 엄숙한 것은 아니지만 깨어난 책을 다시 잠들게 하는 일이기에 아주 신중한 판단력과 집중력이 필요하다. 이곳에 들어와 단 한 번도 잠든 책을 깨우지 못한 자들도 있다. (나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그런 분이다) 늘 언제나 침묵이 도사리고 있는 곳 그림자들의 은밀한 생이 펼쳐지는 곳 나는 오늘도 이곳에 앉아 침묵과 친분을 쌓으며 몸에 달라붙은 그림자를 잃어버린다.
도서관 열람실에는 늘 그림자가 일렁이는 것 같다. 낮에는 유리벽을 통해서 구름이라든지 창밖 나무 그림자가 비쳐 들어오고, 밤에는 높은 실내 조도로 모든 물체의 그림자가 선명한 거다. 그렇게만 생각했는데, 도서관 특유의 정적이 그림자를 도드라지게 하는 게 아닌가 싶다. 독서에 빠져 있던 사람의 감각은 그림자조차 예민하게 느끼는 것이다. ‘침묵과 그림자들’…. 화자는 ‘오늘도 이곳에 앉아 침묵과 친분을 쌓으며/몸에 달라붙은 그림자를 잃어버린’단다. 밖이 캄캄해질 때까지 도서관에 있었다는 말이겠지만, ‘몸에 달라붙은 그림자’는 자기를 벗어나지 못하는 의식, 혹은 인식인데 책을 읽으며 그 영역이 넓어졌다는 말로도 읽힌다. 진지한 소년이 쓴 도서관 견문기처럼 도서관의 이모저모와 분위기가 순수한 시어로 그려져 있다.
도서관은 깨끗하고 조용하다. 여름에는 서늘하고 겨울에는 따뜻하다. 거기서 서가에 빽빽이 꽂힌 책들이 우리를 기다린다! 내가 자주 가는 남산도서관에는 다갈색 점이 꽃송이처럼 얹힌 크림색 고양이도 살고 있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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