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칼럼/이승헌]클린턴과 부시, 그리고 이명박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9월 1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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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헌 워싱턴 특파원
이승헌 워싱턴 특파원
추석인 8일 미국 워싱턴 시내 ‘뉴지엄’에서 열린 ‘대통령 리더십 연구(PLS)’ 프로그램 발족식은 7월 특파원으로 부임한 뒤 접한 행사 중 가장 인상적이었다. 프로그램을 주도한 빌 클린턴, 조지 W 부시 전 대통령 같은 세계적 명사를 한꺼번에 눈앞에서 본 것도 그랬지만 무엇보다 한국과는 너무 다른 전직 대통령 문화를 새삼 느꼈기 때문이다.

우선 전직 대통령이 활발히 대외활동을 하는 것부터가 그렇다. 이날 행사처럼 현직 대통령이 있는 백악관으로부터 자동차로 불과 5분 떨어진 곳에서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게 아무렇지도 않다. 한국 전직 대통령들은 주로 고향집에 칩거(고 노무현 전 대통령)하거나 사무실에 있다가 다른 사람의 눈을 피해 테니스 치는(이명박 전 대통령) 것이 주요 일과다.

이는 전직 대통령을 보는 인식 차이와 무관치 않다. 발족식 사회를 본 조슈아 볼턴 부시 행정부 당시 백악관비서실장은 두 전직 대통령을 내내 ‘대통령님(Mr. President)’으로 불렀지 ‘전 대통령님(Former President)’으로 부르지 않았다. 행사 뒤 볼턴 전 실장에게 물었다.

“왜 전직 대통령을 대통령님이라고 부릅니까. 예우 차원인가요?”(기자)

“그가 대통령이었던 시점을 존중하자는 의미죠. 그 시기는 현재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니까요. 미국에선 보편화된 표현입니다.”(볼턴)

클린턴과 부시가 미국 최초로 전직 대통령이 주관하는 대통령 리더십 연구 프로그램을 열 수 있는 것도 이런 문화적 토양에서 가능했을 것이다. 국민은 전직 대통령을 역사로 인정하고 그 바탕 위에서 전직 대통령은 나름의 역할을 찾아 사회에 기여하는 선순환 구조를 만들어 내는 셈이다. 재임 기간은 낙제점이던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이 오히려 퇴임 뒤 중동 등 세계 분쟁지역에서 해결사 역할을 하며 노벨 평화상까지 받은 게 대표적이다.

반면 한국 전직 대통령들은 퇴임 순간부터 보수 진보할 것 없이 역사의 창고에 갇혀 버리는 일이 다반사다. 이전 정권의 정책은 대부분 폐기되거나 수정된다. 그러다 보니 대통령 리더십 연구는 고사하고 재임 5년간 대통령이 어떤 결정을 내렸는지 잊혀질 때도 종종 있다. 이는 엄청난 사회적 비용으로 연결된다. 민주당이 여당이던 2007년 노무현 대통령이 추진했던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4년 뒤 반대하는 코미디를 벌인 것도 이런 문화가 한 배경이다.

이런 환경에서 전직 대통령이 사회에 기여할 기회는 별로 없다. 워싱턴 부임 전 이명박 전 대통령을 만난 적이 있었다. 그는 “현직 경험을 살려 뭐를 해보려 해도 우리나라엔 참고할 만한 전직 대통령의 사례가 별로 없더라. 쉽지 않다”며 답답해했다. 한국 민주화의 양대 산맥인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이나 김영삼 전 대통령의 심정도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인정할 만한 전직 대통령이 있었느냐”는 말이 나올 수도 있다. 하지만 전직 대통령을 역사로 인정한다는 건 ‘존경’과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한 대통령의 역사에서 비판할 것과 수용할 것을 제대로 가려내 교훈을 얻자는 쪽에 가깝다. 그냥 수장된다면 국가적 손해일 수밖에 없는 이유다.

한국 사회도 진영 논리를 떠나 뒤늦게나마 새로운 전직 대통령 문화를 고민할 때가 아닐까 싶다. 마침 내년 2월 시작하는 PLS 프로그램은 전 세계를 대상으로 수강생을 모집한다고 하니 청와대가 대통령 문화 연구 차원에서 전문가를 보낼 수도 있을 것이다. 수강료도 무료라서 예산 낭비 논란을 걱정할 필요도 없다. 박근혜 대통령도 나중엔 또 한 명의 전직 대통령이 된다.

이승헌 워싱턴 특파원 ddr@donga.com
#대통령 리더십 연구#빌 클린턴#조지 W 부시#이명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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