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전 약속은 없었다. 일방적인 통보만 있었을 뿐이다. 4년 전 중국 광저우. 한국과 대만의 야구 조별리그 첫 경기가 열리고 있는 아오티야구장에 국회의원 몇 명이 수행원을 대동하고 나타났다. 밤늦게 경기가 끝나고도 대부분의 선수는 야구장에 남아 ‘사역’을 했다. 돌아가며 의원들의 ‘인증 샷’ 모델이 돼줘야 했기 때문이다. 야구장뿐만 아니다. 의원들은 다른 종목 경기장에도 불쑥불쑥 나타나 아이처럼 신나게 사진을 찍고 다녔다. 해당 종목과 별 인연도 없는 의원들의 방문에 관계자들은 당황스러워했다. 조금이나마 더 쉬고 싶어 하는 선수들을 억지로 붙잡아 놓고 사인까지 받아 놨다. 광저우에서만 그런 것도 아니다. 올림픽이든 아시아경기든 국제대회가 열리는 곳마다 정치인의 방문은 끊이지 않았다. 양심은 있었는지 공짜로 촬영을 요구하지는 않았다. 얼마가 담겼는지 모를 ‘금일봉’은 내놨던 것 같다.
대한체육회와 한국야구위원회(KBO) 등 국내 스포츠 단체들은 이달 초 일제히 성명서를 발표했다. 체육진흥투표권(스포츠토토)에 레저세를 부과하려는 정치권의 움직임에 반대한다는 의사를 분명히 한 것이다. 국회의원 13명이 발의한 대로 지방세법 개정안이 통과되면 스포츠토토 수익금에 크게 의존해 온 국내스포츠 기반이 붕괴될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체육계 발표에 따르면 레저세가 부과될 경우 체육진흥기금이 1년에 4000억 원이 넘게 줄어든다.
KBO의 경우 그동안 배분받은 수익금의 70% 이상을 유소년 야구에 투자해 왔다. 최근 리틀야구가 월드시리즈에서 우승할 수 있었던 데는 스포츠토토 수익금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기금이 감소한다고 당장 성인들의 프로야구에 영향을 주지는 않겠지만 꿈나무들에 대한 투자가 줄면 한국 야구의 미래는 장담할 수 없게 된다. 축구, 배구, 농구도 마찬가지다. 저변이 열악한 장애인체육은 타격이 더 크다. 올해 장애인체육회 예산 496억 원 가운데 기금 지원이 450억 원가량이나 된다. 특단의 대책 없이 기금 수입이 줄면 장애인체육은 존립 기반 자체가 흔들리게 된다.
물론 점점 열악해지는 지방세 수입원을 확보하기 위해 레저세 부과에 찬성하는 의견도 만만치 않다. 스포츠가 국민의 먹고사는 문제와 직접적인 연관은 없다는 것이다. 틀린 얘기는 아니다. 하지만 체육 관련 예산이 전체 정부 예산의 1% 안팎인 선진국과 달리 0.3%에 불과한 국내 현실에서 그나마 한국 스포츠를 지탱해 온 국민체육진흥기금까지 넘보는 것은 스포츠를 ‘물’로 보는 염치없는 짓이다.
인천 아시아경기 개막이 나흘 앞으로 다가왔다. 국내에서 열리기에 의원들의 행차는 해외 대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을 것이다. 이들 중에 한국 스포츠의 앞날을 위해 레저세 부과 반대를 소신 있게 주장할 의원이 얼마나 있을까. 그런 소신은 없어도 되니 제발 여러 사람 귀찮게 하는 ‘인증 샷’이나 찍지 않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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