혐오라는 말을 붙여줄까 늘 죽을 궁리만 하던 여름날 머리를 감겨주고 등 때도 밀어주며 장화를 신고 함께 걷던 애인조차 떠났을 때 나는 사라지기 위해 살았다
발 아픈 나의 애견이 피 묻은 붕대를 물어뜯으며 운다 그리고 몸의 상처를 확인하고 있는 내게 저벅저벅 다가와 간신히 쓰러지고는, 그런 이야기를 사람의 입을 빌려 말할 것만 같다 ‘세상의 어떤 발소리도 너는 닮지 못할 것이다’
네가 너는 아직도 어렵다는 얘기를 꺼냈을 때 나는 우리가 한번이라도 어렵지 않은 적이 있냐고 되물었다 사랑이 힘이 되지 않던 시절 길고 어두운 복도 우리를 찢고 나온 슬픈 광대들이 난간에서 떨어지고, 떨어져 살점으로 흩어지는 동안 그러나 너는 이상하게 내가 손을 넣고 살며시 기댄 사람이었다
‘한번이라도 어렵지 않은 적이’ 없었단다. 결국 ‘사랑이 힘이 되지 않던 시절’이 오고. 두 사람은 자기를 ‘찢고 나온 슬픈 광대들이’ 되어 서로 물고 뜯기도 했을 테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누추한 모습을 보이지 않을 수 없는 가난. 그래도 나만큼 가난하고 나보다 약한 ‘너는 이상하게/내가 손을 넣고 살며시 기댄 사람이었다’. 그랬건만 떠났다. 누추하다 못해 혐오스러운 현실에 ‘늘 죽을 궁리만 하던 여름날’. 애인은 떠나고 애견은 발을 다쳐 ‘피 묻은 붕대를 물어뜯으며’ 울부짖는다. 만신창이가 돼 쓰러져 있는 화자에게 개가 다가와 풀썩 몸을 눕힌다. 그 슬프고 불안한 눈빛이 무슨 말을 하는 것 같다. ‘세상의 어떤 발소리도 너는 닮지 못할 것이다’. 이런 말 아닐까. 내겐 당신밖에 없어. 세상 어떤 발소리도 대신할 수 없는 당신 발소리를 잃지 않게 해줘.
이 시가 실린 시집 ‘비버리힐스의 포르노 배우와 유령들’은 몸도 마음도 집시인 화자들이 거침없이 펼치는 성적 판타지가 인상적이다. ‘미찌꼬의 오르가즘은 모든 것을 병든 기관지처럼 빨아들이고 뱉어내지 굶주림에 지친 채로 오, 미찌꼬, 미찌꼬’(시 ‘미찌꼬의 호사가’)같이 요사스러운 매력을 뿜는 시구가 즐비한데, 간간 ‘왜 네 영혼은 영혼이 들지 않는 아픈 몸만 골라 떠도니’(시 ‘텍스처 무비’)같이 단아한 시구가 열을 가라앉히고 숨을 돌리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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