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새해 첫날 김관진 국방부 장관(현 대통령국가안보실장)이 전군에 내린 장관서신에서 언급한 사자성어다. ‘창을 베고 적을 기다린다’는 뜻으로 항상 전투태세를 갖춘 무인(武人)의 자세를 강조한 말이다. 그는 이순신 장군이 노량해전을 앞두고 난중일기에 쓴 ‘차수약제 사즉무감(此讐若除 死則無憾·원수를 무찌른다면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다)’도 인용했다. 천안함 폭침과 연평도 포격도발로 우리 장병과 국민을 무참히 살해하고, 영토를 유린한 북한의 만행을 더는 좌시하지 않겠다는 국방수장의 결기로 비쳤다.
실제로 ‘김관진 효과(effect)’는 강력한 대북 억지력을 발휘했다. 매서운 눈빛과 단호한 말투로 적이 도발하면 끝까지 격멸하라고 강조한 그의 재임기간에 북한은 ‘도발다운 도발’을 못했다. 역대 네 번째 장수 국방장관, 새 정부 출범 후 유임된 첫 국방장관이라는 화려한 기록을 세우고 ‘외교안보 사령탑’에 기용된 그의 행보는 초미의 관심사다. 국가안보실장 취임 후 첫 방미 결과에는 이목이 더 쏠릴 수밖에 없다.
최근 김 실장의 방미를 계기로 남북 관계가 급물살을 탈 것이라는 관측이 잇따르고 있다. 김 실장이 북한의 남북 고위급 접촉 수용을 전제로 5·24 대북제재 조치 해제 등에 대해 백악관과 사전조율을 했을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5·24 조치 해제가 시간문제라는 전망도 나온다. 북한 외무상의 15년 만의 유엔총회 참석, 일본의 대북제재 해제 등 북-미, 북-일 관계의 개선 조짐이 가속화되는 상황에서 한국만 언제까지 ‘나 홀로 원칙’을 고수하기 힘들다는 얘기다.
일부 정치권 인사와 전문가들은 주변국과의 대북 외교전에서 한국이 고립되거나 소외되지 않으려면 5·24 조치의 전향적 해결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천안함 폭침의 공개 사과와 재발 방지 약속 등 북한의 선제적 상응 조치가 없더라도 경협 확대 등 적극적 대북 제안으로 남북 관계를 주도해야 한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5·24 조치를 남북 관계의 최대 장애물로 낙인찍는 분위기마저 읽힌다. “5·24 조치 때문에 아무것도 못한다” “5·24 조치에 더는 얽매여선 안 된다”는 주문이 여권 일각에서 나올 정도다. 나라에 목숨 바친 장병들의 숭고한 희생을 정치적 거래나 외교적 흥정의 제물로 삼자는 얘기로 들린다면 과민한 반응일까.
5·24 조치의 섣부른 해제나 완화는 북한에 ‘면죄부’를 주는 행위라고 본다. 우리 장병 46명을 수장(水葬)시킨 천안함 만행을 남측의 ‘특대형 모략극’으로 왜곡하는 북한의 파렴치하고 가증스러운 태도는 조금도 변한 게 없다. 핵 개발을 포기할 기미도 전혀 보이지 않는다. 올 들어 동해상으로 100여 발의 신형 방사포와 탄도미사일을 발사하는 무력시위도 이어갔다. 평북 동창리의 장거리로켓 발사장은 조만간 완공된다.
이런데도 5·24 조치를 풀어야 한다는 말인가. 만약 정부가 무작정 대북제재의 빗장을 걷어낸다면 북한은 이를 남한의 ‘굴복 신호’로 간주하고 쾌재를 부를 것이다. 더 대담하고 기상천외한 수법으로 대남 도발을 시도하고, 남남 갈등을 부추길 것이 불 보듯 뻔하다.
과거 정권에서 감상적이고 성급한 대북 유화책이 안보를 금가게 만들어 대남 도발의 악순환을 초래한 뼈아픈 교훈을 잊어선 안 된다. 1, 2차 연평해전과 금강산 관광객 피살사건, 세 차례의 핵실험, 장거리로켓 발사 등 호의를 베푼 동족의 등에 ‘비수’를 꽂은 숱한 사례가 그 증거다. 그런 측면에서 5·24 조치는 도발과 협박에는 혹독한 대가와 고통이 따른다는 남북 관계의 물러설 수 없는 원칙이자 보루라고 본다.
북한의 진정한 태도 변화 없이는 ‘드레스덴 통일구상’도, ‘통일대박론’도 공론(空論)의 한계를 벗어날 수 없음을 정부는 거듭 직시해야 한다. 주변국들의 대북 접근에 조바심을 내며 대북정책의 원칙을 허무는 듯한 모양새를 보이는 것은 국익에 결코 도움이 되지 않는다. 국제사회도 한국의 태도를 눈여겨볼 것이다. 원칙을 세우는 것은 힘들지만 이를 유지하는 것은 더 고통스럽고 지난한 과정이다. 북한을 길들이려면 인내와 결연함이 필요하다. 김 실장이 대북정책의 원칙을 유지하도록 중심을 잡아주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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