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311>있다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9월 19일 03시 00분


있다
―이준규(1970∼ )

그것은 그럴듯하게 있다. 그것은 그럴듯하게 나무에 앉아 있다. 그것은 파란 모자를 쓰고 지팡이를 짚고 그럴듯하게 가고 있다. 그것은 책상 앞에 앉아 그럴듯하게 있다. 그것은 그럴듯하게 있다. 그것은 그럴듯하게 돌아가고 있다. 그것은 그럴듯하게 물을 빼고 있다. 그것은 그럴듯하게 물건을 옮기고 있다. 그것은 그럴듯하게 지하철 안에서 두리번거리고 있다. 그것은 개수대 앞에 서서 커피가 담긴 잔을 작은 숟가락으로 그럴듯하게 젓고 있다. 그것은 젓가락으로 참치 회를 집어 입으로 그럴듯하게 가져가고 있다. 그것은 그럴듯하게 절 앞에 있다. 그것은 그럴듯하게 무덤 앞에서 오열한다. 그것은 북극에서 남극으로 그럴듯하게 이동하고 있다. 그것은 머리를 긁으며 그럴듯하게 그를 쳐다보고 있다. 그것은 진심이 담긴 호소하는 눈빛으로 그럴듯하게 낙지를 바라보고 있다. 그것은 꼬았던 다리를 몇 번 바꾸며 그럴듯하게 의자에 앉아 있다. 그것은 그럴듯하게 병상에 누워 있다. 그것은 그럴듯하게 관 속에 들어가 있다. 그것은 아무런 의심 없이 아무런 의심 없는 책장을 그럴듯하게 넘기고 있다. 그것은 묵묵히 그럴듯하게 수증기를 내뿜고 있다. 그것은 그럴듯하게 성기를 성기 속으로 밀어넣고 있다. 그것은 그럴듯하게 있다.      
        

‘그럴듯하다’는 긍정적으로 쓰이는 형용사다. 그런데 뻔히 그러한 것을 ‘그럴듯하다’라고 하면 의혹의 기미가 덧씌워진다. 과연 그럴까? 화자는 눈에 보이는 모든 현상을, 그 존재를 끊임없이 의심한다. 아니, 제 감각을 의심한다. 감각하고 있는 제 존재를 의심하고 확인하려 한다. 커피를 타 마시고, 책을 읽고, 외출하고, 누군가와 참치 회를 먹고, 연애도 하고, 멀쩡히 일상생활을 하면서 화자는 그 모든 존재와 행위의 아슬아슬함을 감지하는 것이다. ‘파란 모자’니 다리를 꼬고 있는 낙지니 이렇게 선연한데, 이 선연한 존재들이 과연 정말 ‘있다’라고 할 수 있을까? 화자는 세계와 겉돈다. 그 겉돎, 회의하는 자아가 생로병사에 대해서도 섹스의 순간에도 ‘그럴듯하게’라고 차갑게 작동한다. 그러한 게 아니라 그럴듯한 현상세계의 비탈에서 화자는 자꾸 미끄러지는 생의 실감을 잡으려 ‘있다’고 되뇐다. 있다, 있다, 있다! 정말 있는 거야? ‘빼고 있다’ ‘옮기고 있다’ ‘밀어넣고 있다’ 등 현재진행형이 유독 많은 시다. 현재진행형은 현재형 ‘뺀다, 옮긴다, 밀어넣는다’로 쓰는 게 더 깔끔하다. 시인은 굳이 현재진행형을 씀으로써 흐리마리한 자신의 존재감을 끊임없이 확인하고 있다. 그러니까 의심하고 있다.

황인숙 시인
#있다#이준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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