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과 2년 전 일본은 앞이 캄캄한 나라였다. ‘잃어버린 20년’이라 불리는 장기불황 속에 경제 규모는 중국에 역전당했다. 소니 파나소닉 등 간판 전자기업은 세계 시장에서 한국 기업에 줄줄이 패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동일본 대지진이 터졌고 전국 54개 원전은 가동이 중단됐다. 그런데도 세계 경제의 불안 속에 엔화 가치는 치솟아 수출 기업들의 비명이 끊이지 않았다. 나랏빚은 국내총생산(GDP)의 2배를 넘었다. 더 큰 문제는 정치 리더십이었다. 1년마다 바뀌는 총리는 대책은커녕 정권 유지에도 벅찼다. 국제사회는 일본 총리가 누구인지조차 몰랐다.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는 의미의 ‘기메라레나이(決められない) 정치’가 일본병의 근원으로 지목됐다. 언론은 국가 파탄 시나리오를 그린 ‘일본의 자살’을 대서특필했다.
우경화 논란과 별도로 지금 일본은 활력이 넘치고 있다. 돈이 돌면서 도쿄 시내 곳곳에는 주택 건설 붐이 불고 있다. 도쿄 오사카 나고야 등 3대 도시 택지 기준지가(공시가격)가 6년 만에 상승했다는 뉴스가 신문 1면을 장식한다. 2020년 도쿄 올림픽 특수도 불어 일손이 부족할 정도다. 올 4∼6월 약 99만 명의 비정규직 근로자가 정규직으로 전환됐다. 일본 제조업의 발목을 잡던 엔화 가치는 18일 한때 6년 만의 최저 수준인 달러당 108엔대로 떨어졌다. 소비자물가가 오르면서 20년 경기 침체를 초래한 디플레이션에서도 벗어날 조짐이다. 돈을 풀어 경기를 부양하는 아베노믹스에 대한 논란은 여전하지만 어쨌든 일본 경제는 실로 오랜만에 움직이고 있다. 국민 과반수가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를 지지하는 이유다.
한때 일본은 한국을 배워야 한다고 스스로를 채찍질했다. 외환위기 이후의 금융개혁과 기업혁신뿐만이 아니다. 총무상을 지낸 가타야마 요시히로(片山善博) 게이오대 교수는 2003년 돗토리(鳥取) 현 지사 시절 이렇게 말했다. “새로운 정책을 추진할 때마다 한국에서 힌트를 얻는다. 한국은 빠른 속도로 많은 실험과 개혁을 거듭했다. 어떤 제도든 한국을 보면 그 결과를 예측할 수 있다.”
그런데 세월이 흘러 요미우리신문은 18일자 국제면에 ‘한국 국회 마비’를 대서특필했다. 세월호 참사 여파로 5월 3일 이후 국회에서 법안을 한 건도 처리하지 못했고 국민은 분열돼 있다는 것이다. ‘기메라레나이 정치’는 이제 한국을 위한 수식어가 될 판이다.
오랜만에 일본을 찾은 한국의 한 경제 전문가는 “달라진 일본의 모습에 등골이 서늘했다”고 털어놓았다. “정책 결정 속도가 한국과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빠르다. 성장전략 등 새로운 정책을 추진할 때 전문가 태스크포스를 구성해 회의 몇 번 하면 금방 핵심 이슈와 대안이 정리된다. 그만큼 참여한 전문가 층이 두껍다. 정부는 이를 바탕으로 정책안을 만들면서 쟁점을 언론에 다 노출해 자연스럽게 국민 의견을 수렴한다. 의회에서 발목을 잡을 일도 없다. 반면 한국에서는 새 정책을 추진하려면 우선 전문가가 없다. 연구기관에 조사·연구 용역부터 발주하는 데 1년은 기본이다. 정책화 과정도 대부분 비밀리에 추진해 발표가 되면 그제야 논란이 시작된다. 이를 야당이 정치 쟁점으로 몰아가면서 아무것도 되는 게 없다.”
물론 일본의 달라진 모습은 자민당 독주 체제와 무관치 않다. 지나친 쏠림은 민주주의의 적으로 언제나 경계 대상이다. 하지만 무섭게 변해가는 글로벌 경쟁 환경 속에 정치 불능은 20년 디플레이션보다 무섭다는 게 일본의 경험이다. 요즘 한국이 2년 전 일본을 닮아가는 것 같아 걱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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