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룸/손택균]위험한 면죄부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9월 22일 03시 00분


손택균 문화부 기자
손택균 문화부 기자
“그는 이미 자신의 모든 죄과를 참회하고 주님의 용서와 사랑 속에 마음의 평화를 누리고 있었다.”

전도연 송강호가 출연한 영화 ‘밀양’의 원작소설인 ‘벌레 이야기’는 초등학교 4학년 사내아이를 무참히 살해해 건물 지하실 바닥 콘크리트 속에 암매장한 주산학원 원장의 말로를 그렇게 묘사했다.

종교에 귀의해 평온하게 마지막 날을 기다렸다는 범인의 교수형 집행 소식을 한 라디오 프로그램이 굳이 방송으로 내보낸다. 잔혹한 살인자의 개심을 담은 유언이 전해진다. “제가 왜 죽음을 두려워하겠습니까. 아직 무서운 슬픔과 고통 속에 있을 아이 가족을 위해 저세상에 가서도 기도하겠습니다.”

방송이 나간 이틀 뒤 아이 어머니는 유서 한 장 없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옅은 희망을 남긴 영화의 결말과 다르다. 고(故) 이청준 작가는 ‘밀양’ 개봉을 맞아 내놓은 2007년 개정판 서문에서 이 소설이 1980년대 초 서울에서 벌어진 실제 사건을 소재로 했음을 밝혔다. 그는 ‘평화로운 마음으로 떠나간다던 범인의 유언이 참혹한 사건보다 더 충격이었다’고 썼다.

최근 인터넷에서 한 TV 오디션프로그램 참가자의 과거 학교폭력 행적에 대한 논란이 일었다. 노래는 훌륭했다. 심사위원들은 한결같이 감동 어린 표정으로 그의 새로운 도전에 찬사를 보냈다. 그 참가자가 부른 곡은 방송 후 2주가 지난 지금까지 대중음악 온라인 음원차트 상위권에 머물고 있다.

젊은 혈기에 저질렀던 과오를 반성하고 타고난 재능을 살려 새 삶을 찾으려 하는 이의 노력은 응원 받아 마땅하다. 매력적인 목소리에 감탄한 심사위원들의 환호와 조언도 책잡힐 까닭이 없다.

그러므로 모든 게 잘된 걸까.

참가자는 “노래를 통해 새 꿈을 찾았다”고 머뭇머뭇 말했다. 피해자가 그의 이야기를 접하지 않았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무심코 버스나 지하철에 앉아 스마트폰 모바일 포털을 들여다보다가, 아니면 늦은 밤 별생각 없이 TV를 틀었다가 그의 목소리를 들은 피해자는 어떤 기분이었을까. 방송의 갈무리는 ‘벌레 이야기’의 라디오 프로그램을 빼닮았다. 피해자에 대한 배려는 어느 구석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저 TV 쇼일 뿐이다. 0.01%의 시청률 전쟁에 사활을 걸고 밤잠을 거르는 제작진에게 이 글은 한심스럽고 우스꽝스러운, 허튼 잔소리에 지나지 않을 거다.

하지만 그럼에도 다시 묻는다. 어떤 식으로든 ‘논란’을 일으켜 관심을 끌어야 한다는 조바심에 쫓긴 나머지, 마음 한구석에 당연히 들었을 거리낌을 짓눌러 무시하지 않았는지. 특이하고 감동적인 사연만을 쫓은 소설 속 라디오 프로그램이 무엇을 외면했는가 잘 알고 있는 것 아니었는지. 낯모르는 누군가의 삶마저 쥐락펴락할 위력을 갖고 있음을 익히 알면서 짐짓 잊은 척하지 않았는지. 시청률 바벨탑 쌓기에 공을 들이느라 위험천만한 면죄부를 ‘굳이’ 뿌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손택균 문화부 기자 sohn@donga.com
#학교폭력#밀양#벌레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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