촌철살인으로 유명했던 마크 트웨인은 이를 ‘고전’이라 불렀다. 어디 고전뿐일까. 책장에 빼꼭한 ‘인테리어 소품’을 볼 때마다 마음 한구석이 뜨끔하다. 이름값 때문에 읽으려다가 결국 못 읽은 책들이다. 그럼에도 최근 한 권이 더 늘었다. 세계적으로 화제가 되고 있는 경제학자 토마 피케티의 ‘21세기 자본’이다.
‘21세기 자본’은 국내에서 출간되자마자 벌써 4만 권 가까이 팔렸다. 덩달아서 ‘21세기 자본 바로 읽기’나 ‘위대한 탈출’처럼 피케티 이론에 반대되는 책들도 잘 나간다고 한다. 심지어 마르크스의 ‘자본론’까지 새삼스레 조명 받으면서 ‘21세기와 자본론’ ‘자본론 공부’ ‘맑스를 읽다’ 같은 책들도 쏟아졌다. 이쯤 되면 피케티 신드롬이라는 말이 과장은 아닌 것 같다.
경제서임에도 제인 오스틴부터 오노레 드 발자크까지 풍부한 문학 작품을 사례로 인용해 쉽게 썼다는데, 쉽게 읽히진 않는다. 책 두께도 목침 수준이다. 나 같은 독자를 배려해서인지 한국에서만 친절하게 해제를 담은 30쪽 분량의 별책 부록 ‘피케티 현상 어떻게 볼 것인가?’를 출판사가 자체 제작해 책에 끼워 준다.
한 시간 만에 ‘21세기 자본’을 책장에 곱게 꽂아 놨다. 스스로를 위로하며 떠올린 건 얼마 전 월스트리트저널에 실린 글이었다. 주석 빼고 본문만 700쪽에 달하는 ‘21세기 자본’을 과연 독자들이 실제로 몇 페이지나 읽었는지를 분석한 내용이었는데 놀랍게도(또는 당연하게도!) 26쪽에서 멈춘 것으로 나타났다.
분석에 사용된 ‘호킹지수(Hawking Index·HI)’는 간단히 말해서 독자가 어떤 책을 얼마나 읽었는지를 %로 환산해 보여주는 지수다. 수치가 낮을수록 책을 끝까지 다 읽지 않았다는 걸 뜻한다. ‘21세기 자본’의 호킹지수는 2.6%였다.
안 읽히는 책의 대명사인 ‘시간의 역사’를 쓴 물리학자 스티븐 호킹의 이름에서 지수 명칭을 따왔는데, ‘시간의 역사’(6.6%)와는 비교도 안 되게 안 읽힌 셈이다. 월스트리트저널은 “앞으로는 호킹지수 대신 피케티지수라고 불러야 할지도 모른다”고 했다.
물론 이 신문도 밝혔듯 아마존 전자책의 하이라이트 기능을 이용해 분석하는 호킹지수는 재미삼아 참고만 할 뿐 정교한 과학적 지수는 결코 아니다. 하지만 꽤 공감이 갔다. 워싱턴포스트도 올 7월 호킹지수를 인용한 비슷한 분석 기사를 실었는데 당시 화제의 신간이었던 힐러리 클린턴의 자서전 ‘힘든 선택들’이 사놓고도 끝까지 읽지 않은 책 1위(호킹지수 2.0%)로 꼽혔다.
경험상으로 봐도 반짝 화제로 뜬 베스트셀러나 폼 잡는 책일수록 호킹지수가 낮을 가능성이 크다. ‘다들 읽는다니까 나도…’, ‘이런 책쯤은 읽어줘야’ 하는 마음으로 샀다가 결국은 안 읽게 되는 책들이다.
문화체육관광부가 발표한 ‘2013 국민독서 실태조사’에 따르면 우리나라 성인이 1년 동안 읽는 책은 9.2권이었다. 평균 잡아 한 달에 한 권조차 안 읽는다는 얘긴데 끝까지 다 읽지 않는 호킹지수까지 적용하면 제대로 읽은 책은 더 적을 것 같다.
독서의 계절이라는 가을이다. 읽어야만 할 것 같은 책은 안 읽어도 괜찮다. 남들이 다 읽는다는 책도 알고 보면 남들도 다 읽지는 않는다. 그냥 내 마음에 드는 책을 한 권 골라 읽어보자, 끝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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