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대통령은 23일 유엔 기후정상회의에서 “한국 정부는 창조경제의 핵심 분야로 기후변화 대응을 위한 에너지 신산업을 육성하고 있다”며 2015년부터 아시아 최초로 전국 단위 배출권 거래제를 시행할 것이라고 연설했다. 한국이 유치한 유엔 녹색기후기금(GCF)의 재원을 최대 1억 달러(약 1040억 원)까지 늘리겠다고도 했다.
이 말을 들으면 한국이 온실가스 감축 선도 국가인 것 같지만 꼭 그런 건 아니다. 배출 할당량은 산업계의 거센 반발에 당초 계획에서 크게 줄어들었다. 박 대통령의 기후정상회의 연설이 예정에 없었더라면 배출권 거래제는 아예 사망했을 것이라는 말도 나온다. 국제사회와의 약속을 어길 수 없어 제도는 살려놓되 숨만 유지하게끔 만들었다는 얘기다.
박 대통령이 “규제는 원수이자 암덩어리”라고 했을 때 환경부를 겨냥한 말은 아니었겠지만 환경부의 사기가 눈에 띄게 떨어진 것도 사실이다. 각종 정책을 두고 경제부처와 ‘밀고 당기기’를 하던 환경부는 최경환 경제부총리 취임과 함께 본격적으로 궁지에 몰리기 시작했다. 친(親)시장 친기업 정서가 뚜렷한 실세 부총리 앞에서 환경부는 계모 앞의 콩쥐 신세가 됐다.
아니나 다를까, 정부는 배출권 거래제와 함께 내년 1월 시행하기로 한 저탄소 협력금 시행시기를 2020년 이후로 연기했다. 말인즉 연기이지만 사실상 취소다. 저탄소 협력금은 온실가스를 많이 배출하는 자동차엔 부담금을, 적게 배출하는 차엔 보조금을 주는 제도다. 지난 정부에서 관련 기업과 무수한 논의를 거치고 당시 지식경제부와도 합의했고 여야 합의로 법도 통과됐던 것인데 ‘경제 살리기’란 이름으로 뒤집어졌다.
지난 정부의 핵심정책 중 하나인 신재생에너지의무화제도(RPS·Renewable Portfolio Standard)도 뒷걸음질치고 있다. RPS는 발전사업자가 총발전량의 일정 비율을 태양광, 풍력, 바이오매스 등 신재생에너지로 공급하도록 한 제도다. 의무를 채우지 못한 기업엔 상당한 과징금을 부과해 에너지 전환을 유도하게 된다. 그런데 산업자원부는 RPS 대상에 원전과 화력발전소의 엔진과 장비를 식히고 나온 온배수를 넣겠다고 한다. 냉각수가 엔진을 식히고 나온 물인 온배수를 신재생에너지에 넣으면 진짜 신재생에너지 투자가 격감하는 건 물론이고 국제기준에도 맞지 않아 세계가 배꼽을 쥐고 웃을 것이다.
환경 행정은 기업 활동으로 인한 외부효과를 없애기 위한 정부 개입이다. 규제가 본질이라는 얘기다. 기업은 정부 정책이 어떤 방향으로 갈지를 보고 투자를 결정한다. 정책의 일관성을 잃으면 앞서 투자한 기업은 손해를 보게 되고, 정부 말을 따르지 않고 버틴 기업만 이득을 본다. 그런데 지금 환경 정책이 딱 이렇다. 전임 정부의 신재생에너지 정책을 믿고 태양광 사업에 뛰어들었던 기업들이 줄줄이 사업을 철수하는 게 그 증거다.
이명박 정부의 녹색성장은 환경 규제를 통해 일자리도 만들고 성장도 하겠다는 것이었다. 박근혜 정부가 녹색성장이란 용어에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는 것은 이해 못할 바 아니다. 그러나 같은 정책을 갖고 지난 정부는 경제를 살린다 하고 지금 정부는 경제를 죽인다고 하니 애먼 국민은 헷갈릴 뿐이다. 이 정부 사람들이 규제의 옳고 그름을 가리지 않고 규제는 전부 나쁘다는 집단사고에 갇힌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윤성규 환경부 장관은 농반진반으로 “내가 ‘28사단 윤 일병’ 같은 처지”라고 말한 적이 있다. 윤 장관의 별명이 ‘독일 병정’이다. ‘환경부 윤 일병’이 얻어맞아야만 경제가 살아나나. 경제회생을 위해 환경이 희생돼도 좋다는 분위기가 개발연대로 돌아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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