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미술에서는 찾아보기 힘들지만 20세기 이전에는 도덕적인 교훈을 주제로 한 그림이 그려지곤 했다. 18세기 프랑스의 장 바티스트 그뢰즈는 교훈화를 그린 대표적인 화가였다.
소녀티를 갓 벗은 젊은 여성이 생각에 잠긴 채 서 있다. 화가는 꽃다운 처녀의 미모를 강조하기 위한 듯 예쁜 꽃으로 머리를 장식하고 비단 치마폭에 꽃을 가득 담고 있는 장면을 연출했다. 흥미로운 점은 사랑스러운 미녀가 깨진 도자기 주전자를 팔에 끼고 있다는 것. 생뚱맞게 깨진 주전자가 인물화에 등장한 이유는 무엇일까?
처녀가 순결을 잃은 타락한 여성이라는 뜻이다. 과거 가부장적 사회에서 여성의 혼전순결은 숭배되었다. 미혼 여성이 처녀성을 잃은 것을 ‘몸을 더럽혔다’고 비유한 것에서도 나타나듯 처녀성의 상실은 본인의 불행이며 가족의 수치, 재앙이었다.
이 그림은 육체적 순결에 집착하던 시대의 보수적인 성 윤리관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처녀성을 잃은 여성은 물이 새는 주전자처럼 결혼시장에서 상품가치가 없다고 노골적으로 말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런데 순결 이데올로기를 부추기는 그뢰즈표 교훈화는 왜 더이상 그려지지 않을까?
김별아의 소설 ‘내 마음의 포르노그라피’에 나오는 문장이 그 대답이 될 수 있으리라.
무엇 때문에 순결했고 무엇을 잃었기에 순결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인가? 그 순결은 정체가 없었다.
나는 그저 내 삶을 살았을 뿐이다. 다른 상처들을 앓을 때와 마찬가지로 욕망의 성장통을 앓았을 뿐이다. 나는 결코 스스로를 더럽다고 생각하지 않았고 실로 더럽지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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