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에 꼭 쥐여 주던 쪽지도 나는 계곡으로 던져버리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음박질쳤는데 그 쪽지는 급물살 타고 아득히 멀어져갔는데
사십 년이나 지난 지금까지도 옷을 달라고 속눈썹 깜빡이는 여자
그 바위 뒤에서 벌거벗은 채 마흔 번의 겨울을 어찌 다 견뎠는지
늙지도, 죽지도 않고 그 붉은 루즈도 닦지 않고
주근깨 몇 개 가만히 붉은 입술에 섬처럼 떠올라 초조한
내가 처음 본 여자의 몸, 나리꽃 화신
사십 년쯤 전의 신문 광고란이 떠오른다. 주부들의 춤바람을 사회가 심각하게 걱정하던 시기에는 댄스홀 광고문이 ‘땐’ ‘땐’ ‘땐’ ‘땐’ ‘땐’, 도배하다시피 했다. 집중적으로 눈에 띄다 뒤이어 성행한 직업들에 자리를 내주던 ‘병아리 감별사, 해외이민’ ‘간호조무사, 해외이민’ ‘칵테일’…. 광고를 좇은 서민의 아들딸들은 꿈을 이뤘는지. 두세 줄 작은 광고로 촘촘했던 그 면에는 집 나간 가족을 찾는 광고가 드물지 않게 실렸다.
‘수남이 엄마, 모든 걸 용서하오. 속히 돌아오오.’ ‘영숙 엄마, 다 해결했으니 속히 돌아오오, 애들이 기다리고 있소.’ 어째 여자를 찾는 글만 떠오른다. 그것도 잘못한 쪽인 것 같은 여자들만. 여자가 도망갈 정도로 나쁜 남자들은 그만한 정성이 없기 때문이리라.
이 산 저 산, 나리꽃이 난만한 아름다운 계절에 아름다운 나이인 여인이 ‘바위 뒤에 숨어서/긴 머리카락으로 맨몸을 가리고’ 떨고 있다. 도망가려다 들켜서 심한 봉변을 당한 게다. 오죽하면 발가벗겨진 채 뛰쳐나가 산에 숨었을까. 다행히 어린 소녀를 만나 도움을 청했지만, 소녀는 혼비백산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아난다.
느닷없이 마주친 성숙한 여인의 나신에서 어른들 세계의 벌거벗은 모습을 보고, 그 불행과 폭력의 비릿함에 감당 못할 공포를 느낀 것이다. 자신의 철없던 저버림에 가책 받으며 화자는 그 여인에게 나리꽃이라는 옷을 입혀준다. ‘내가 처음 본 여자의 몸, 나리꽃 화신’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