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미국 뉴욕 맨해튼 펜실베이니아역 인근 메이시 백화점에 들렀다. 아시아계 여성 직원이 기자 목에 걸린 유엔 출입증을 보고 한국말로 물었다.
“유엔에서 일하세요?”
“출입하는 특파원입니다.”
“반기문 사무총장님, 너무 자랑스러워요.”
반 총장(70)은 미 교포사회에서도 큰 자랑거리다. 한 교포는 반 총장이 방문객에게 선물로 주는 ‘반기문 시계’를 가보처럼 간직하겠다고 했다. 한국인이 유엔 사무총장일 때 유엔을 출입하는 것도 행운이다. 7월 초 부임 인사차 사무총장실을 방문했을 때 책꽂이에서 통일항아리를 발견하곤 감동이 밀려왔다. 유엔 수장 집무실에서 한글로 적은 ‘남북통일’이란 글자를 볼 수 있다니….
그 뒤로 3개월여. 반 총장에 대한 느낌은 ‘큰 축하를 받으며 좋은 집안에 시집갔는데 고생만 해서 안쓰러운 누님’ 같다. 일단 몸이 상했다. 2009년 1월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에서 연설하다가 현장 화염을 들이마셔 기관지를 크게 다쳤다. 한때 목소리가 거의 안 나올 정도였고 지금도 치료를 받는 지병(持病)이 됐다.
사방이 적(敵)이다. 가자지구 사태와 관련해 중동 국가들은 반 총장 지도력을 비난하고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편만 든다”고 손가락질한다. 친이스라엘계 단체는 최근에도 반 총장을 노골적으로 깎아내리는 신문 전면광고를 냈다. 유엔 사무총장을 ‘세상에서 가장 불가능한 직업(the most impossible job)’이라고 부르는 이유를 알 만하다.
유엔 주변에선 “반 총장이 ‘미국’이란 시댁 때문에 마음고생이 많다”는 얘기도 들린다. 점잖게 생긴 버락 오바마 대통령도 유엔의 방향과 미국 국익이 충돌할 때 반 총장에게 얼굴 붉히는 걸 서슴지 않는다고 한다. 한 유엔 소식통은 “미국 영국 등 영어권 인사들이 유엔 회의 때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반 총장을 힘들게 하려고 일부러 아주 빨리 말할 때도 있다”고 귀띔했다. ‘설마’ 하는 생각이 들지만 아니 땐 굴뚝에서 연기 나랴.
반 총장은 모든 일을 잘하고 모두에게 잘해야 하는 스타일이다. 한 외교관은 저서에서 “100m 달리기 선수와 같은 속도로 42.195km의 마라톤을 완주하는 분”이라고 묘사했다. 그러나 그런 반기문다움이 반기문의 어려움을 가중시키는 건 아닌지 자문해볼 때가 된 것 같다. 반 총장은 지난달 TV 정치 토크쇼에 출연해 “유엔 현안이 너무 많지 않냐”는 질문에 “문제 해결을 위해 어느 한 곳 예외 없이 다 방문했다”고 대답했다. 그런데도 일부 외국 언론들은 여전히 ‘존재감 없는 사람(Nowhere Man)’이라고 비판한다. 최근 뉴욕타임스 등은 “비정치적 이슈인 에볼라 사태야말로 유엔과 반 총장의 존재 이유를 증명할 기회”라고 썼다.
반 총장은 방북 얘기만 나오면 어느 이슈보다 민감하게 반응한다. 방북할 의지는 강하다면서도 방북 가능성만 보도돼도 크게 손사래를 친다. 미국을 시댁에 비유했던 유엔 소식통들은 “마치 시댁 식구 몰래 친정일(남북관계) 챙기려다 들킨 며느리 같다”고 빗댔다.
반 총장은 정해진 길을 벗어나지 않는 모범생 삶을 꾸준히 살아왔다. 하지만 ‘10년 임기를 잘 마쳤다’는 평가에만 만족할 게 아니라면 새로운 길을 개척하려는 일탈이 필요한 시점이지 않나 싶다.
북한 최고위급 특사단이 전격 방한하는 등 급변하는 한반도 정세에서 한국인 유엔 사무총장이 멀리서 박수만 치고 있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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