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원전 401년 페르시아 왕자 키루스는 형이자 국왕인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에게 반기를 들었다. 그는 자신이 거느린 페르시아 군대를 강화하려고 그리스에서 용병을 모집했다. 모병에 응한 그리스 용병은 1만 명 가까이 되었다. 키루스는 대담하게 페르시아의 심장부를 바로 공략했지만, 결국 실패했다.
‘1만 인’의 그리스 용병은 적국 한가운데에 홀로 남았다. 페르시아 대군에게 포위되었지만, 항복을 거부했다. 그들의 전투력을 두려워한 페르시아 사람들은 그들이 고국 그리스로 귀환하는 것을 허용했다. 그러나 화합을 축하하는 자리에서 페르시아 군대는 그리스 용병 장군들을 병사들과 분리시킨 뒤 죽여 버렸다. 부대에 남았던 장군 하나만 살았다.
남은 용병들은 항복하라는 페르시아 군대의 요구를 거부하고 장군들을 새로 뽑았다. 그리고 그리스로 갈 수 있는 흑해 항구를 향해 북쪽으로 행군하기 시작했다. 행군은 쉽지 않았다. 기병대가 없었으므로 수시로 페르시아 기병들의 공격에 시달려야 했다. 북쪽 산악지역에선 요처들을 미리 점령한 원주민들의 공격을 받았다. 그래도 그들은 흩어지지 않고 잘 싸워서 다섯 달 뒤 마침내 흑해 연안의 그리스 식민도시에 닿았다.
지도자를 고르는 적극적 능력, 추종력
역사상 가장 유명한 후퇴 작전인 이 ‘1만 인’의 퇴각은 용병 장군들 가운데 하나였던 크세노폰의 ‘북쪽으로의 행군(Anabasis)’에 기록되어 후세에 널리 알려졌다. 당시 용병들의 조국인 그리스에선 민주주의가 시행되었고, 그들은 민주적 절차에 따라 자신의 지휘관들을 뽑았다. 덕분에 우리는 ‘1만 명’의 행태에서 추종력(followership)의 중요성을 새삼 깨닫게 되고 그것의 정체를 엿볼 수 있다.
첫째 교훈은 추종자들이 집단의 목표와 환경을 잘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1만 인’은 너무나 절박한 처지에서도 그것을 잘 알았다, 싸워서 탈출해야 한다는 것을, 그리고 페르시아 사람들의 달콤한 권유를 받아들이면 비참한 죽음이나 더 비참한 노예의 삶이 기다린다는 것을 말이다.
둘째는 추종자들이 집단의 목표를 이룰 지도력에 대해서 잘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직업적 군인들이라, 그들은 물론 길고 험난할 후퇴 작전에 필요한 지도력이 무엇인지 잘 알았다. 셋째, 그들은 그런 판단에 따라 장군들을 뽑았다. 다른 요소들은 무시하고 오직 당장 위기에서 벗어나는 데 필요한 지휘관의 자질을 가진 동료들을 지도자들로 뽑은 것이다.
넷째, 한번 장군들을 뽑은 뒤엔 흔쾌히 장군들의 지휘를 받았다. 흑해에 이를 때까지 명령에 대한 불평이나 불복종은 전혀 없었다.
이처럼 추종력은 지도자를 스스로 고르고 따르는 적극적 능력이다. 당연히, 추종력이 큰 집단에선 지도자의 지도력도 뛰어나다.
아쉽게도, 우리 시민들의 추종력은 크지 않다. 그리고 그것이 뛰어난 지도자의 출현을 막는 가장 큰 요인이다.
먼저, 우리 시민들은 대한민국의 이념과 체제에 대한 충성심이 아주 약하다. 사회학자 송복 교수의 추산에 따르면, 20∼25% 시민들이 대한민국에 대해 적대적이라 한다. 선진국 수준보다 3배 정도 높은 적대 세력의 존재는 사회를 불안정하게 하고 정치 지도자들의 지도력을 크게 줄인다.
지도력 성찰부족 보여준 ‘안철수 현상’
다음엔, 우리 시민들은 지도자들이 갖춰야 할 지도력의 모습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그저 자신들의 답답함을, 어려운 사회 문제들을 시원스럽게 풀어달라고 요구한다. 그런 답답함이나 사회적 문제들은 지도력으로 풀리기 어렵다는 사실은 늘 외면하면서 말이다.
이번에 영화 ‘명량’으로 분출된 이순신 장군의 지도력에 대한 흠모나 프란치스코 교황의 지도력에 대한 열광에서 이 점이 잘 드러난다. 싸움터에서 필요한 지도력은 또렷하다. 싸움은 너 죽고 나 살자는 이인영합경기(two-person zero-sum game)이므로, 전략과 전술을 잘 고르고 부하들을 독려하고 앞장서서 모범을 보이면 된다. 그래서 전쟁마다 영웅들이 많이 나온다. 이순신 장군은 보기 드물게 위대하지만, 그의 지도력은 보기 드물게 특별하지는 않다.
반면에, 정치 지도자는 이해가 엇갈리고 이념이 다른 시민들이 어울려 살도록 살펴야 한다. 선거에서 자기를 지지하지 않았고 극도로 증오하는 시민들까지 포용해야 한다. 그래서 무슨 문제든 시원스럽게 풀 수 없고 흔히 모든 시민들로부터 비난을 받는다.
교황의 지도력도 크게 다르지 않다. 그가 종교적 차원에서 좋을 얘기들을 하면, 사람들이 열광한다. 그러나 막상 현실 문제에 부닥치면, 교황의 지도력은 아주 미약하다. 이번에 북한 주민들의 인권에 대해 침묵한 데서 그 점이 잘 드러난다. 중국에 대한 호의 표시도 마찬가지다. 근년에 바티칸과 베이징은 주교 임명권을 놓고 대립했다. 중세에 천주교 교회가 세속의 정권들과 피 흘리면서 다툰 문제를 새삼 맞은 셈이다. 교황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 문제는 쉽게 풀릴 것 같지 않다.
우리 시민들의 비합리적 기대는 이미 ‘안철수 현상’에서도 드러났다. 안철수 씨는 작은 기업 하나를 일구었다는 것 말고는 업적도 없고, 정치적 능력도 알려진 것이 전혀 없었다. 그런 사람을 다수 시민들이 ‘구세주’로 여겨 대통령 후보로 지지한 일은 우리 시민들이 우리 사회에 필요한 지도력에 대해 깊이 성찰하지 않음을 괴롭게 보여주었다.
우리 시민들은 또 자질을 보고 지도자를 뽑지 않는다. 영남과 호남이 각기 자신을 특정 정당과 연계시켜 무조건 지지함으로써 스스로 자신들의 자유로운 정신을 노예들의 비굴한 정신으로 바꾸어왔다. 자연히, 뽑힌 지도자는 임기 내내 다른 지역의 주민들로부터 배척을 받았고, 그들과 소통할 길을 마련하지 못했고, 잘해야 절반 가까운 시민들의 지지를 받는 약한 지도자로 남았다.
좋은 지도자 찾기전 물어야 할 것들
우리 시민들은 지도자를 뽑고서도 지도자를 적극적으로 따르지 않는다. 민주주의는 다수의 지지를 받은 후보를 전체 시민들의 지지를 받은 것으로 간주한다. 기회의 평등으로 결과의 불평등을 정당화하는 것이다. 그러나 시민들 가운데 적잖은 사람들이 대통령을 지도자로 인정하지 않고 선거 다음 날부터 공공연히 물러나라고 외친다. 심지어 국회의원들 가운데도 옮기기 민망한 언사를 통해 태연히 대통령을 모욕한다.
이런 풍토는 자연스럽게 확산되어, 제1야당의 경우 당 지도자는 실질적으로 아무런 권한도 없다. 협상이란 상대가 있음을 전제로 하는데, 여당 대표와의 협상안을 의원들이 거푸 거부하는 판이다. 그런 정당에선 지도력 운운하는 것이 허망한 노릇이다.
사람은 대개 자신에게 걸맞은 것을 얻는다. 한 사회의 시민들은 그들에게 걸맞은 지도자를 얻는다. 사회는 점점 복잡해지고 사회적 문제들은 점점 풀기 어려워진다. 그런 상황을 과감하게 헤칠 지도자를 찾는다면, 우리는 먼저 자신들에게 물어야 한다, “내가 지금까지 보여 온 추종력은 얼마나 합리적이었나? 어떻게 해야, 내 추종력을 높일 수 있을까?”
※ 지금까지 11회에 걸쳐 지도력에 대한 제 생각을 말씀드렸습니다. 읽어주신 독자들께 깊은 감사 말씀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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