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의기구 역할 한계 보인 국회, 더 이상은 희망 안보여
국민투표 적극적인 활용, 지방의회 입법권 강화 등 국회 기능-권한 분산 필요
美-유럽처럼 독립기구 신설, 입법권 부여도 고려해 볼만
국회의 기능과 권한을 줄일 필요가 있다. 특히 국회가 배타적으로 행사하는 입법권을 위아래로, 또 옆으로 분산시킬 필요가 있다.
아침 신문을 읽다 홧김에 불쑥 나온 말이 아니다. 몇몇 국회의원들의 면면이 싫어서, 또 그들이 벌이는 치졸하고도 비생산적인 정치가 싫어서만도 아니다. 어찌 보면 그들 역시 스스로 어찌할 수 없는 구조적 모순의 피해자다.
이유는 보다 본질적인 데 있다. 간단히 말해 오늘과 같이 변화가 심하고 이해관계가 복잡한 세상에서 국회 같은 대의기구가 제대로 작동할 수 있을까에 대한 의문이다. 미래학자 나이스비츠가 말한 것처럼 의회제도 자체가 이제 박물관으로 갈 때가 되지 않았나를 생각해 보는 것이다.
당장에 국회가 다루는 정책만 해도 그렇다. 세상이 변하면서 그 양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 우리 국회도 초기에는 많아야 한 해 수백 건 정도의 법률안이 제안됐다. 그러던 것이 지금은 수천 건이 된다. 이 많은 문제들을 국회가 제때 합리적으로 처리할 수 있을까. 컨베이어 벨트에 묶여 있는 조직이 아닌 대화와 타협의 장인 국회가 말이다.
양만 늘어난 게 아니다. 구조도 복잡해졌다. 신념과 이해관계가 얽혀 이것을 풀면 저것이 맺히고, 저쪽을 고려하면 이쪽이 달려든다. 대립과 갈등이 발생할 수 있는 문제들이 산적해 있다. ‘아차’ 하는 순간, 세월호법처럼 옴짝달싹할 수 없는 상황에 놓이게 된다. 빠른 결정을 요구하는 문제들이 점점 더 많아지고 있는데도 그렇다.
일이 풀리지 않으니 이당 저당 할 것 없이 국민적 신뢰는 바닥으로 떨어진다. 표를 먹고사는 사람들이다. 무슨 일이 일어나겠나. 우세를 유지하기 위해 서로 상대방 때문이라 삿대질한다. 선명성을 부각시키느라 툭하면 대치에 장외투쟁이다. 그러다 국민여론에 같이 죽을 지경이 되면 합의 날치기로 법안들을 무더기로 처리한다.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답은 하나다. 그 한계가 분명한 국회의 기능과 권한을 분산시키는 일이다. 그 과정에서 대의민주정치의 대안인 직접민주정치 요소를 활용하는 것이다.
분산은 종적 분산과 횡적 분산을 모두 생각해 볼 수 있다. 먼저 종적 분산으로는 국민투표를 보다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방안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최근 관심을 끌고 있는 전자원탁회의 등 숙의(熟議)민주주의 기법도 좋은 대안이 된다. 모두 직접민주주의를 강화하는 일이자 입법권을 국민에게 돌려주는 일이다. 빠르게 발전하고 있는 정보통신기술을 활용하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있다.
지방분권을 통해서 입법권을 지방의회와 지역시민사회로 내려 보내는 것도 중요한 대안이 된다. 미국이나 유럽의 의회가 건강성을 유지할 수 있는 배경에는 상당한 수준의 지방분권과 이를 통한 의회의 입법 부담 완화가 있다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지금 저 모양의 지방의회에? 정신이 나갔느냐 물을 수 있다. 그러나 지금의 지방의회 또한 국회의 이기적이고 비합리적인 결정의 산물이다. 노력 여하에 따라 크게 달라질 수 있다. 더 고무적인 것은 적지 않은 지방정부들이 전자원탁회의 등을 통해 지역시민사회가 직접 결정을 하게 하는 실험들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기대를 걸어 볼 만한 시도들이다.
횡적 분산으로는 유럽과 같이 조합주의적인 기구들을 만들어 입법권과 준입법권을 부여하는 방식과 미국처럼 행정부로부터 독립된 규제위원회를 만들어 활용하는 방식 등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이 역시 이들 국가의 의회가 건강성을 유지할 수 있는 배경이기도 하다. 당장에 정치 관련 입법을 국회와 떨어진 기구를 만들어 설계하게 하는 것은 어떨까? 국회가 제대로 돌아갈 때까지만이라도 말이다.
사실 우리는 늘 속고 산다. 이 판이 지나가면 뭔가 나아지겠지, 저 당이 이기면 좀 좋아지겠지 한다. 그러면서 국회의 권한을 강화하는 것이 답이라 생각해 왔다. 그리고 또 그런 길을 걸어 왔다.
그러나 고개를 넘고 넘어도 또 고개다. 국정원 선거 개입 어쩌고 하는 판을 넘으면 세월호법 판이 벌어지고, 이걸 넘으면 또 다른 무엇이 있다. 누가 이기건, 누가 지도자가 되건 지금의 기능과 권한을 그대로 가지고 있는 한 국회는 언제나 저 모양일 것이다.
이제 제대로 물을 때가 됐다. 대의민주주의와 국회의 한계는 어디까지인가. 차라리 희망을 조금씩 내려놓고 대안을 찾는 편이 옳다. 그 편이 오히려 우리 정치와 국회를 바로잡는 길이 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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