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에 출간한 이경희 시집 ‘분수(噴水)’에서 옮겼다. 세로로 흘러내리는 시구들이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나아간다. 이런 아치(雅致) 있는 편집 형태가 일본에는 아직 남아 있는 모양인데, 우리나라에서는 세로쓰기는 오래전에 사라졌다.
시집만큼이나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시다. 정갈하고 조금은 쓸쓸한 모녀의 삶이 장지문에 비껴드는 가을 아침 햇살처럼 맑고 소슬하게 그려져 있다. 댓돌이 유난히 상긋해 보이고, ‘풀 먹인 치마폭’이 문득 빳빳하게 종아리를 스친다. 아, 가을인가. ‘다홍고추를 다듬는’ 어머니의 손마디가 더 울룩불룩해진 듯해 가슴이 아프다. 무심히 머리를 빗는데, 거울 속에 비치는 한 가닥 새치. 언제 생겼지…. 집 안에도 마당에도 화자의 가슴속에도 가을의 빛이 아른아른 남실거린다. 가슬가슬한 가을의 빛이! 이처럼 얌전하고 사뿐한 맵시에 열정을 더한 시인의 다른 시 ‘분수VI’ 앞부분만 소개한다. ‘내 당신 속에 들고/당신 또한 내 속에 들었음에도/이상하여라/허공을 헤집는/손, 손, 손,//허공의 손들을 끌어내리려/발꿈치는 늘 꿈꾸듯 매달려 있네’ 숨죽인 가운데, 몽환적이고 감각적인 발레를 보는 듯하다.
마당과 꽃밭이 있는 한식 기와집들이 언젠가부터 거의 자취를 감추고 그 자리에 고층빌딩이나 공용주택이 들어섰다. 제 집 마당에서 ‘깡마른 호박넝쿨 위에/길게 늘어진 추녀 그림자’를 보며 사는 사람의 정서도 함께 사라졌을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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