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O대학 축제 마지막 날 밤 11시경 △△동아리 주점에서 본 여학생을 찾습니다. 키는 160∼165cm에 이마가 보이게 머리를 뒤로 묶었습니다. 꼭 좀 찾고 싶습니다.”
대학 축제가 한창이던 최근 며칠간 제 페이스북 타임라인은 이처럼 ‘그때 그 사람’을 찾는 글로 도배됐습니다. 축제 때 우연히 마주친 이상형에게 미처 전화번호조차 묻지 못한 청춘남녀들이 늦게나마 그, 그녀를 찾아보겠다며 마음을 담아 SNS에 글을 올린 겁니다. 그 용기가 반가워 ‘좋아요’를 누르려는데 문득 글을 올린 ‘OO대학교 대신 전해드립니다’라는 사용자 이름이 눈길을 끌었습니다. 사람을 찾아주는 흥신소 계정이라도 있는 걸까요?
‘대신 전해드립니다.’
최근 들어 SNS상에서 자주 눈에 띄는 페이지입니다. 대신 전해준다는 이름 그대로 이 페이지는 사용자들이 개인적으로 메시지를 보내면 이를 공유해 다른 사용자들에게 전달해주는 역할을 합니다. 직접 밝히기 힘든 이야기 또는 널리 알리고 싶은 이야기가 페이지의 이름을 타고 타임라인으로 퍼지게 됩니다. 마치 라디오 DJ 같다고 할까요?
페이지의 종류도 다양합니다. 고등학교, 대학 소식을 대신 전해주는 학교 페이지부터 서울 노원구처럼 특정 지역의 소식을 전하는 페이지도 있습니다. 현재 페이스북에서만 420여 개의 ‘대신 전해드립니다’ 페이지가 검색되고 있습니다. 유사한 것으로 ‘OOO 대나무숲’이라는 이름이 붙은 페이지도 검색됐습니다. 그 어디에도 털어놓지 못한 사연을 속 시원히 이야기하라는 의미이겠죠.
대신 전해드립니다 페이지의 영향력은 생각보다 막강했습니다. 실제로 OO학과 단발머리 여학생을 찾는다는 글에는 친구들이 등장해 해당 학생을 태그함으로써 여자 주인공이 수면 위로 등장하기도 했습니다. 물론 모든 글이 낭만적인 결과를 만든 건 아니었습니다. 구구절절한 사연에도 불구하고 댓글 하나 없는 글에는 괜히 처연한 마음이 들어 저도 모르게 ‘좋아요’를 선물했습니다.
물론 그때 그 사람을 찾는 역할만 하는 건 아닙니다. 일례로 올 8월 폭우로 침수 피해를 입었던 부산 북구 덕천동의 경우 ‘덕천동 대신 전해드립니다’가 실시간으로 침수 피해 상황을 전해 적게나마 피해를 줄였습니다. ‘성균관대 대신 전해드립니다’에서는 한 학생이 지갑을 잃어버린 사연을 올렸다가 약 6시간 만에 ‘지갑을 주워 건물 로비에 맡겨 놨다’는 답변을 받기도 했습니다.
이 밖에도 강의 평가는 어떤지, 서비스 좋은 동네 미용실의 위치는 어디인지 등을 묻는 다양한 사연들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하나같이 SNS가 우리의 일상과 얼마나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생생한 사례들이었습니다.
일상의 사연들을 옮겨놓은 이 페이지들을 보면서 저는 문득 ‘사이버 망명’ 이슈가 떠올랐습니다. 사이버 망명은 지난달 18일 검찰이 ‘사이버 명예훼손 전담수사팀’ 신설을 밝힌 직후 국내 모바일 메신저 ‘카카오톡’ 이용자들이 독일의 ‘텔레그램’으로 갈아타는 현상을 말합니다.
수사당국은 ‘법원으로부터 압수수색 영장을 발부받지 않으면 대화내용을 확보할 수 없다’며 진화에 나섰지만 한번 불이 붙은 불안감은 쉽게 사라지지 않습니다. 때마침 트위터가 미국 정부의 사찰 정보 요구 현황 자료를 공개하도록 법원에 소송을 냈다는 사실은 도리어 걱정을 부채질하게 합니다. SNS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해온 사람일수록 뒤가 찜찜한 기분을 지울 수 없을 겁니다.
임금의 비밀을 지켜야 했던 복두장(옛날 왕이나 벼슬아치가 머리에 쓰는 복두를 만드는 사람)은 결국 아무도 없는 대나무 숲으로 가야했습니다. 사이버 명예훼손은 이미 공론화된 사회 문제지만 자칫 외양간 고치려다 소를 잃는 것은 아닐지 우려도 적지 않습니다. 개방과 소통의 공간이라던 SNS가 딱따구리마냥 남 이야기만 ‘대신 전하는 곳’이 되지 않기를 바라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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