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전 일인데도 잊을 수 없는 기억이 있다. 입사 첫해 추석 당일에 있었던 일이다. 사회부 막내였던 기자는 누구도 원하지 않는 명절 당직을 서고 있었다. 개미 한 마리 보이지 않는 텅 빈 편집국에 앉아 기자는 중얼거렸다. “빨리 와라 내년아. 나도 막내 딱지 떼고 명절날 집에 좀 가자.”
그런데 오후 들어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회사에 중년 남자 선배들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한 명, 두 명, 세 명…. 내가 있는 층에만 3명이 나타났으니 다른 층까지 합치면 그 수는 더 많을 듯했다. ‘신문도 안 만드는 날 왜지? 급한 일이 터졌나?’ 생각했지만 딱히 그런 것 같진 않았다. 선배들은 차분한 표정으로 뉴스를 보거나 책을 읽다 해질 무렵 하나둘 집으로 사라져 갔다.
당최 이해할 수 없던 그날 풍경을 이해하게 된 건 얼마 뒤 친구들과의 모임에서였다. 한 친구 왈 “회사 생활을 해보니 집보다 회사를 편안해하는 상사들이 많이 있더라”는 것이었다. “어떻게 집보다 회사가 편하지” 하고 묻자 친구는 “아버지 세대는 가족도 사생활도 없이 평생 회사만 알고 살아 그렇다”는 해석을 내놓았다. 그러다 퇴직하면 상실감이 얼마나 클지, 또 하루를 어떻게 보낼지…. 한국 중년 남성들의 고단한 뒷모습에 마음이 짠했다.
지난달 서울 강남구 삼성동 코엑스에서 열린 ‘중장년 채용박람회’에 다녀왔다. 채용장은 머리가 희끗한 중장년 수백 명으로 북적였다. 대부분 남성인 이들은 생계형 일자리를 알아보러 온 경우도 있었지만 퇴직 후 ‘존재의 의미’를 찾고자 온 경우도 많았다. 자신을 대기업 전(前) 간부라고 소개하는 말쑥한 정장차림 중년 등 경제적으로 여유로워 보이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면접에서 이들은 대부분 “연봉은 중요치 않다”고 말했다. 대신 조직에서 위치나 역할을 많이 물었다. 이들 ‘스펙 좋은 중장년 구직자’들과 인터뷰를 하면 할수록 꽤 많은 중장년들이 돈을 벌 일자리보다 마음을 둘 곳을 찾는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런 고급 인재가 돈까지 안 바라고 일한다는데 쓰려는 기업이 많지 않을까. 하지만 의외로 채용 현장에 나온 기업들은 한결같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한 면접관은 “그런 분들일수록 자존심이 강하고 전문 분야가 특정돼 있다”며 “막상 조직에 투입하기엔 부담스럽다”고 말했다. 실제 이날 돌아본 10개 기업 부스 중 중장년 인재를 채용한 곳은 한 곳도 없었다.
한국에서 고령화가 급격히 진행되면서 중장년 인력을 잘 활용해야 한다는 목소리는 수년 전부터 있어 왔다. 하지만 여전히 우리 사회는 이들에게 제자리를 찾아주지 못하고 있다. 당장 매칭 시스템부터 문제다. 고용동향 분석을 보면 고령 구직자 10명 중 4명은 ‘친구, 친지 소개 및 부탁’을 통해 알음알음 일자리를 구한 것으로 나타난다. 제대로 된 구직 루트가 적어서다. 이 때문에 전체 고령 취업자 중 35.3%는 특기를 살리지 못하고 경비 등 단순 노무직에 종사하는 실정이다.
명절 당일마저 자석에 이끌리듯 회사로 향하는 생을 살아온 한국 중장년 남성들에게 지금 상황은 꽤나 가혹한 것일지 모른다. 그들에게 마음의 위안을 주기 위해서라도 하루빨리 이들을 위한 특화된 퇴직 후 구직 시스템이 마련됐으면 한다. 우리 사회에 더 좋은 노동력을 공급하기 위해서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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