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인준 칼럼]대북 기관들 正위치를 지키라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10월 14일 22시 10분


일본은 북한에 농락당했다… 남북 대화 우리 목표 분명해야
핵 문제에는 ‘통 크게 눈감는’ ‘통 큰 대화’라면 북 체제만 도울 뿐
청와대 일방적 리더십엔 위험성도
국정원-軍-군 정보司-외교부 등 대화무드일수록 냉철하게 所任을

배인준 주필 injoon@donga.com
배인준 주필 injoon@donga.com

일본 아베 정부가 북한한테 농락당한 모양새다. 일본 외무성은 5월 스웨덴에서 북한과 협상했다. 거기서 북측은 “일본인 납북자에 대해 다시 조사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자 일본은 인적 왕래 규제 등 대북 제재(制裁)의 일부를 7월에 풀었다. 그 후 북한은 “살아있는 납북자는 없더라”고 발뺌했다. 새삼 조사할 필요도 없이 북한은 납북자 상황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재조사 쇼를 벌여 제재 완화를 얻어낸 뒤 오리발을 내밀었다. 납북자 송환이 ‘필생의 과업’이라는 아베는 납북자를 데리러 방북 전용기를 띄울 날만 기다리다 궁지에 몰렸다. 아베는 북한이 인도적 문제에 선의를 보일 것으로 믿었는지 모르지만, 북한의 관심은 오직 단물을 빼먹는 데 있음을 다시 보게 된다.

북한은 미국 오바마 정부한테서 뭘 좀 우려먹기는 글렀다고 판단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시진핑의 중국도 전례 없이 냉정하다. 세계 여러 나라에 거지행각을 벌이지만 큰 도움은 못 받고 있다. 일본도 더는 속여먹기 어렵다. 이런 가운데 황병서 최룡해 김양건이 4일 인천을 깜짝 방문했다.

황병서 인천 방문 열흘 뒤인 어제는 나이 서른의 세습 권력자가 지팡이를 짚은 사진으로 북한 매체에 등장했다. 국내외 대북 정보통들은 그가 안 보인 40일간에도 지시를 내리는 상황이 포착되었다고 전한다. 그런데 한 전문가는 “지휘명령의 즉흥성이 도를 더해가는 듯하다”며 “뜻대로 되는 게 별로 없으니까…”라고 풀이했다.

박근혜 정부가 북한과 대화를 한다면 무엇을 이루기 위해 할 것인지 목표가 합당해야 한다. 북측은 “통 큰 대화를 하자”고 하는데, 그것이 핵문제에는 ‘통 크게 눈감고’ 경제는 ‘통 크게 지원하라’는 것이라면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 치밀한 답안이 있어야 한다. 김대중 노무현 정부 때는 안보의 빗장을 스스로 풀면서까지 대화하고 지원했다. 그 대화와 지원은 핵개발과 권력 세습을 견제하기는커녕 오히려 도움을 주었다.

왕조 3대에 들어와 북한은 ‘핵무력 건설과 경제 건설 병진(竝進)’이라는 체제생존 노선에 더욱더 매달리고 있다. 박 대통령은 그런 두 마리 토끼는 잡을 수 없다는 뜻의 말을 해왔다. 하지만 대화를 깨지 않는 데 매달리다 보면 우리 측의 목표는 실종되고, 북한 체제 강화만 돕는 쪽으로 흐르지 말란 법이 없다. 명분은 북한 주민들을 위한 인도적 지원인데, 실상은 독재체제를 지원해 주민들의 질곡을 더 연장하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 그제 통일준비위원회에서 박 대통령에게 보고한 일부 남북 협력방안도 그런 관점에서 재분석되어야 한다. 국익은 낭만적 선의만으로 지킬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어떤 대화도 우리의 안보적 경제적 부담만 키우는 대화여서는 안 된다. 대북 5·24 제재조치의 변경을 논의한다고 하더라도 우리의 요구를 분명하게 제시하고 얻을 것을 얻어내야 한다. 핵 문제, 군사적 신뢰 문제에서 변화를 이루어내야 한다. “그런 것을 다 꺼내면 대화 자체가 안 된다. 우선 되는 것부터 얘기해야 한다”는 주장도 강하다. 하지만 그런 식 접근으로는 북한핵 문제의 출구를 영영 찾을 수 없고, 우리는 북한 핵을 머리에 이고 살아야만 한다.

인천에서 남측 상대들을 지긋이 쳐다보는 황병서의 눈빛과 문득 엿보인 냉소적 웃음을 우리 당국자들은 어떻게 느꼈는지 궁금하다. 우리 측이 덤벙거리고 흥분하면 언제든 당할 수 있다고 나는 보았다. 대화 테이블에서 북한 주민 인권을 말하면 세월호로 옆구리를 찔러 국내 분란을 자극할지도 모른다.

통일부는 대화가 업이니까 좀 설친다 쳐도, 국가정보원과 국군정보사령부 같은 핵심 안보관련 기관들은 정치적 분위기에 좌고우면하지 않고 항상 냉철하게 자신들의 소임을 다해야 한다. 외교부는 북한과 중국 간의 유사시 군사적 자동개입 조항을 해소하는 수준의 대중 외교를 펴야 한다. 군은 원점 타격 원칙을 관철해야 한다. 김관진 안보실장은 국가책략의 깊은 지혜들을 최대한 수렴해 황병서 등과의 게임에서 패착을 두지 않아야 한다. 청와대 국가안전보장회의(NSC)의 대북정책 조율기능이 치밀하게 작동해야 함은 말할 것도 없다. 그 정점에 박 대통령이 존재한다. 일방적 리더십에는 실패의 위험성이 따를 수 있음을 통찰할 필요가 있다. 남북의 체제 전쟁은 끝난 것이 아니다.

배인준 주필 injo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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