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김희균]무상공약, 그 후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10월 15일 03시 00분


김희균 정책사회부 차장
김희균 정책사회부 차장
최근 몇 년간 나는 ‘혹시 우리나라가 산유국이 아닐까’ 하는 의심을 품고 있었다. 초중고교 12년 내내 ‘기름 한 방울 나지 않는 나라’라고 귀에 못이 박이도록 배웠는데도 말이다. 내게 이런 황당한 음모론을 품게 한 것은 교육 현장이다.

최근 시도교육감들은 어린이집 보육료 예산 편성을 거부하면서 지방 재정의 어려움을 호소하고 나섰지만 이미 2010년에 시도교육청의 채무는 10조 원을 넘어섰다. 내국세의 20.27%로 정해진 지방교육재정교부금은 글로벌 금융위기 여파로 2009년 30조 원까지 떨어졌다. 그러다 보니 시도교육청이 발행하는 지방채 규모는 2010년 4조 원에 육박할 정도로 불어났다. 허리띠를 졸라매도 아쉬울 판인데 2010년 교육감 선거를 전후해 각 시도교육청은 경쟁적으로 무상급식을 늘렸다.

이후 교육 현장에서 무상 시리즈는 줄을 이었다. 지난 대통령 선거에서도 후보들은 너나없이 무상 공약을 쏟아냈다. 누리과정 지원사업과 고교 무상교육이 대표적이다. 정부는 세수가 줄어든다고 아우성인데 매년 수조 원씩 어떻게 감당하겠다는 것인지 의아했다. 실제로 내 아이의 유치원비 고지서에서 매달 22만 원이 감액되는 것을 눈으로 확인하고 나니 ‘정부가 삼면을 둘러싼 바다 어디쯤엔가 엄청난 유전을 숨겨놓고 있는 것 아닌가’라는 의심이 드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물론 이런 말도 안 되는 생각은 지난달 발표된 2015년 예산안을 보고 말끔히 사라졌다. 교육부가 신청한 누리과정 예산 2조2000억 원, 초등 돌봄교실 예산 6600억 원, 고교 무상교육 예산 2420억 원이 한 푼도 배정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설상가상으로 내년 지방교육재정교부금이 올해보다 1조3000억 원 줄어든다는 소식을 접한 시도교육청으로서는 발끈하지 않을 수 없다. 정부가 유보통합을 추진한다며 보건복지부 관할인 어린이집의 보육비 지원까지 시도교육청 부담으로 넘겨놓은 터라 더욱 그렇다.

여기에 최경환 기획재정부 장관은 “시도교육감들이 국민과 어린이를 볼모로 정부를 위협하고 있다”며 불난 집에 기름을 부었다. 기재부의 논리는 단순하다. 어린이집 보육비를 지방교육재정교부금으로 부담하는 것은 이미 지난 정부에서 합의가 끝났다는 것. 기재부는 ‘학생 수는 줄어드는데 왜 지방교육재정은 자꾸 늘어나느냐’는 압박까지 가하고 있다.

하지만 지방교육재정 악화의 주범은 감당하지도 못할 무상 공약의 남발이다. 시도교육청의 교육복지 관련 지출은 2009년 1조6667억 원에서 지난해 5조17억 원으로 급증해 전체 세출의 10%를 육박한다. 자연히 학교교육여건개선시설비나 교수학습지원비는 쪼그라들었다.

서울시내만 둘러봐도 쩍쩍 금이 간 교실에 20년 묵은 책걸상이 수두룩하다. 친환경 급식 재료 사느라 돈이 부족하다며 안전성이 떨어지는 싸구려 세제로 식판을 닦는 학교도 있다. 그런데도 정치인들은 대책도 없이 무상 공약을 쏟아냈다. 지난 교육감 선거에서도 무수한 후보들이 교복, 체육복, 아침밥, 참고서, 수학여행, 통학버스까지 무상으로 주겠다고 나섰다. 다들 나처럼 산유국 음모론자인가 보다.

세상에서 제일 욕먹는 일이 ‘줬다 뺏는 것’이다. 국민들을 표로 보는 정치인들이 실제로 보육비 지원이 끊기도록 놔두지는 않을 거라 본다. 대신 누가 폭탄을 떠안을지 결정하는 과정에서 지금처럼 부처 간, 또 중앙정부와 지방정부 간에 공방이 오갈 것이다.

이 와중에 가장 울화통이 터지는 것은 기재부도, 교육부도, 지방교육청도 아니다. 이런 난센스를 지켜보는 국민들이다. 보육비 지원을 위해 국채를 발행하든 지방채를 발행하든, 결국 그 빚은 국민들 몫이다.

김희균 정책사회부 차장 foryou@donga.com
#예산#무상급식#고교 무상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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