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룸/이성호]참 잔인한 나라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10월 16일 03시 00분


이성호 사회부 차장
이성호 사회부 차장
“끝까지 싸워야죠.”

표현은 비장했지만 휴대전화 속 목소리는 차분했다. 오히려 전화를 건 기자가 머쓱해졌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2년 전 경기 수원시에서 발생한 ‘오원춘 사건’ 피해자 A 씨의 남동생이다. 그와 통화한 것은 2일 서울고법의 판결이 내려진 다음 날이었다. 경찰의 늑장수사로 무고한 생명이 희생됐다며 손해배상을 청구한 유족들에게 2130만 원을 배상하라고 결정한 바로 그 판결이다.

재판부가 결정한 배상 금액은 처음 유족들이 제기한 3억6100여만 원은 물론이고 1심에서 결정된 1억800만 원에 비해서도 크게 줄어든 액수다. 이미 살해범 오원춘의 무기징역형 확정으로 유족들의 마음은 갈가리 찢긴 바 있다. 이번 판결은 아물지 않은 그들의 상처를 다시 짓이겼다.

“돈 때문이 아니잖아요.”

A 씨의 남동생은 속상해했다. 유족들이 재판에 매달리는 이유가 거액의 배상금 때문이 아니냐는 시선 때문이다. 이들을 절망에 빠지게 한 것은 돈이 아니라 경찰의 부실 수사 여부에 대한 재판부의 판단이었다. 재판부는 처음 피해자의 112 신고를 받은 경찰이 현장에 출동한 경찰에게 제대로 정보를 전달하지 않은 것을 인정했다. 하지만 정보가 제대로 전달됐더라도 피해자가 무사히 구출될 가능성은 낮다고 봤다. “오원춘의 난폭성과 잔인성을 고려할 때 생존 상태에서 구출 여부를 장담하기 어렵다”는 것이 이유다.

법조계에서는 이번 판결에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이가 많다. 국가 배상 판례의 경우 의무 위반 여부를 규명한 뒤 책임의 비율을 따져 배상을 결정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한 변호사는 “문제가 된 경찰의 조치 가운데 일부가 피해자 사망과 직접적인 인과관계가 없다고 본 것 같다”며 “오원춘의 난폭성을 다소 과장되게 본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이번과 달리 앞서 1심 재판부는 경찰의 조치와 피해자 사망의 인과관계를 인정했다. 다만 경찰이 모든 범죄를 완벽하게 막을 수 없다는 점에서 30%가량의 책임만 지운 것이다.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서영교 의원(새정치민주연합)은 “피해자가 생존해 구출될 수 있었던 가능성 또한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며 재판부 결정을 반박했다.

2년 6개월이 지났지만 아직도 A 씨의 유족들은 사건 전 일상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A 씨 아버지는 사건 이후 더 이상 일을 못하고 있다. 피해자와 함께 수원에 살던 언니는 사건 직후 근처로 이사했다가 얼마 전 남편 아이들과 함께 아예 친정이 있는 고향으로 집을 옮겼다. 평범한 대학생이었던 남동생은 상처 입은 가족들을 대신해 각종 법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뛰어다니고 있다.

“옛날로 돌아갈 수는 없잖아요. 남은 가족들끼리 서로 위로하고 의지하며 살아가야죠.” A 씨 남동생의 바람은 그저 ‘살아남은 자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덜어내는 것이다. 대한민국이 그들에게 더 잔인한 나라로 기억되지 않기를 바란다.

이성호 사회부 차장 starsky@donga.com
#오원춘 사건#배상금#재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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