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방형남]노무현 ‘남북합의’의 후유증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10월 1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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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형남 논설위원
방형남 논설위원
북한이 대북전단(삐라) 살포 중단을 집요하게 요구하는 배경에는 나름대로 근거가 있다. 노무현 정부 때 이뤄진 남북합의가 그들의 무기다. 남북은 2004년 6월 장성급 회담에서 서해 해상의 우발적 충돌 방지와 군사분계선 지역의 선전활동 중지를 약속했다. 서해 평화는 남한이 더 원하고, 심리전 중단은 북한에 더 절실한 목표여서 외형상으로는 균형을 맞춘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뜯어보면 남한은 포기할 게 많은 대신 북한은 잃을 게 별로 없는 불평등이 합의서 곳곳에 도사리고 있다.

당시 남한은 심리전에서 압도적 우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남한의 경제력이 월등한 데다 북한의 거짓 선전에 속아 넘어갈 만큼 국민이 순진하지도 않았다. 북한은 남한의 심리전이 계속되면 독재정권의 실상이 주민에게 전파될까 봐 전전긍긍했다.

해상 충돌 방지 합의는 1953년 이후 유지되고 있는 서해 북방한계선(NLL)은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은 채 “철저히 통제한다” “부당한 물리적 행위를 하지 않는다”는 추상적 표현으로 채워졌다. 남북이 지켜야 할 기준선을 적시하지 않았기 때문에 북한에 NLL 무시 카드를 넘겨준 것이나 마찬가지다. 반면 심리전 중단은 매우 구체적이다. 확성기를 비롯해 제거 대상 선전수단과 제거 일정까지 상세하게 열거했다.

10년이 지난 지금 북한은 때가 왔다는 듯 대남공세를 강화하고 있다. 10월 4일 실세 3인방의 인천 방문→7일 북한 경비정의 NLL 침범(남북의 함포 교전)→10일 삐라 살포용 비닐풍선 겨냥한 고사총 도발→15일 남북 고위급 군사접촉→16일 남북 접촉 내용 공개로 이어진 북한의 대남공세는 치밀한 전략에 따른 것이다.

북한은 NLL 남쪽에 멋대로 설정한 ‘서해 해상경비계선’ 침범 중단과 삐라 살포 중단을 동시에 요구하고 있다. 남북 합의를 기준으로 하면 북의 삐라 중단 명분은 강력하고, 남의 NLL 준수 요구는 허약하기 짝이 없다.

이쯤 되면 깨달아야 하지 않는가. 북한이 파놓은 함정에 남한이 빠진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 쪽 분위기가 현 정부를 비난하는 쪽으로 변하는 어이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제1야당 새정치민주연합은 북한의 고사총 도발 이후 정부에 삐라 살포 중단을 촉구했다. 노무현 정부의 실세였던 문재인 새정치연합 비대위원은 “(정부는) 대화 분위기를 깨고 안전을 위협하는 대북전단 살포를 못하게 규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일부 언론은 야당 주장에 맞장구를 치고 나섰다. 남북의 함포 교전 기사에 북한 대신 우리 정부를 비난하는 댓글을 다는 누리꾼도 많다. 5·24 대북제재 해제를 촉구하는 목소리까지 덩달아 커지고 있다.

북한은 인천 아시아경기대회에 ‘미녀 응원단’을 보내 남한 사회를 ‘매혹’시키려다 뜻을 이루지 못했다. 하지만 김정은은 북한에 유리하게 돌아가는 남한 상황에 고무돼 “나를 지지하는 남한 응원단이 적지 않구나” 하며 미소를 지을 것만 같다. 그의 귀에는 북한의 공세가 초래한 남남갈등도 자신을 지지하는 응원의 목소리로 들릴 것이다.

북한이 남북 접촉 내용을 상세하게 공개하며 남측을 압박하는 까닭이 무엇일까. 조금 더 밀어붙이면 자기들의 뜻을 관철할 수 있는 상황이 될 것이라는 기대가 있기 때문이다. 북한을 두둔하거나 이해하려는 분위기가 확산되면 남북 사이의 비정상을 바로잡기는 어렵다.

이제라도 북한의 노림수에서 벗어나려면 삐라 살포와 서해 충돌 방지를 다시 한 묶음으로 대화 테이블에 올려놓고 새로운 해법을 모색해야 한다. 대북정책을 주관하는 당국자들이 안팎으로 불리해지고 있는 상황을 감지나 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방형남 논설위원 hnbhang@donga.com
#대북전단#삐라#남북합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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