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세영의 따뜻한 동행]오래된 아름다움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10월 2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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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사는 집에 한 번 놀러 오세요.”

서울에서 만난 그분은 경주 양동마을의 대표적인 고택인 ‘향단’의 안주인이라고 했다. 첫눈에도 오백년 역사의 고택을 감당할 만한 당찬 인상이었다. 한 미국인 관광객이 “이 집이 얼마나 오래되었나요”라고 묻기에 “미국의 역사보다 훨씬 오래되었답니다”라고 답했다는 그분의 이야기에 내 마음까지 뿌듯했다. 한 나라의 역사보다 오래된 집에서 산다는 것, 얼마나 멋진가.

나는 많다거나 높다거나 하는 것에는 별로 기죽지 않는데, 역사가 깊다거나 오래된 것에는 진심으로 경의를 보낸다. 오래되었다는 것은 그동안 숱한 세월을 견디어낸 결과이고 그것을 지키기 위하여 노력한 많은 사람들의 헌신이 들어 있다는 의미니까 말이다.

지난주에는 서울대 규장각에 방문할 기회를 가졌다. 그곳은 고서(古書)의 숲이었다. 줄지어 선 서가에 차곡차곡 진열된 오래된 서책들.

조선왕조실록 등 귀중한 도서를 직접 대하니 가슴이 벅찼다. 수만 권의 고서들도 인상적이지만 수백 년 세월을 까딱없이 견디어준 한지도 놀랍다. 방금 만든 종이처럼 생생하고 깨끗했다. 문자 그대로 천년의 종이를 만들어낸 장인의 솜씨와 정성, 그 위에 붓을 들어 시대를 기록한 사람들, 그리고 그것을 잘 보존하여 우리에게 전해준 분들, 그분들은 몇백 년이 흐른 후에 그 책을 경이로운 눈으로 가슴 뜨겁게 바라볼 후손들의 모습을 상상해 봤을까?

완벽한 보존을 위하여 먼지라도 묻을세라 노심초사하며 최선을 다하는 규장각 사서와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고택을 제대로 간수하기 위하여 무진 애를 쓰는 향단의 안주인을 보면서 그렇게 시간의 무게를 지탱해주는 분들이 있어 우리는 오래된 아름다움과 깊이를 맛보고 향유할 수 있는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올겨울에는 양동마을 향단에 꼭 가보려 한다. 오백년 전에도 누군가 앉았을 반들반들 윤기 나는 마루에 앉아보고, 손때 묻은 문고리를 잡아보고, 수없이 연기가 피어올랐을 굴뚝과 글 읽는 소리가 밴 사랑채도 들여다보고 싶다. 그리고 숱하게 반복된 생로병사, 희로애락의 흔적이 담긴 고택에서 장작불 때고 온돌에 누워 그 긴 세월을 헤아려 본다는 것, 상상만으로도 전율이 스친다.

오래된 것의 아름다움은 과거가 아니라 미래다. 오백년 전을 본다는 것은 오백년 후를 내다볼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윤세영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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